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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아무것도 아니다

New York

2018.05.02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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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닌 걸 갖고'라는 말을 들으면서 생각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듣다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특별한 일이 아닌 것을 가지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자꾸 숨기고, 아무도 아니라더니 나중에 알고 보면 중요한 사람인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실제로는 우리가 모를 뿐이지 중요한 일인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아무'라는 말은 '아무것' 속에서도 쓰이지만 그냥 혼자 쓰여 어떤 사람을 특별히 정하지 않고 이르는 인칭 대명사이기도 합니다. '아무나' '아무도' '아무에게' 등의 예를 들 수 있겠습니다. 딱히 정해지지 않은 사람의 의미입니다. 한편 꾸며주는 말인 관형사로 쓰일 때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 따위를 특별히 정하지 않고 이를 때 쓰는 말이어서 꼭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 음식' '아무 곳' 등의 예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아무리' '아무개' '아무런' 등과 같이 다양하게 결합하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아무'는 여러 모습으로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아무개'라는 말이 아무의 부정확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표현인 듯합니다. 우리나라의 나쁜 사람이나 범인은 아무개라는 이름이 제일 많다는 농담이 생각납니다. 김 아무개, 이 아무개 등.

그런데 이 표현이 몇 장면에서 쓰일 때는 흥미로우면서도 애틋합니다. 한 장면은 '아무것도 모르면서'라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상대가 모든 것을 모른다는 말이라기보다는 뭔가가 있는 것을 아는데 정확히는 모른다는 느낌을 보여줍니다. 뭔가 사정이 숨어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을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표현이죠. 이 말은 종종 '내 마음도 모르면서'라는 표현과도 닿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를 함부로 판단한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왜 나한테 그래요?'라는 항변이 아프게 들려오는 이유입니다. 서로에게는 서로가 모르는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정말 우리는 상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남을 함부로 판단할 때도 '아무것'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처음에 언급한 '아무것도 아닌 걸 갖고 왜 그래?'라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볼 때는 하찮고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만한 작은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당사자에게는 심각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죠. 우울해 하는 사람에게 위로한답시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갖고 왜 신경을 쓰냐고 말하면 위로가 안 됩니다. 왜냐하면 중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은 내 판단이지 당사자의 판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울해 하는 사람이 싫어하는 말 중 하나가 아무것도 아니니까 잊어버리라는 말이라고 하는데 일리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그렇게 기운이 빠질 리가 있을까요? 당연히 그 사람에게는 너무나 힘든 일인 겁니다.

나한테는 중요하지 않을지 모르나 상대에게는 정말 중요한 일이라고 인정을 하는 것이 이해의 시작입니다. 우리 세상의 일이 다 그렇습니다. 어른에게는 중요하지 않지만 아이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일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저래서 괴롭습니다. 괴로움이나 즐거움이나 원인이 사람마다 다르기도 합니다.

아무것이란 게 물건인 경우도 있고, 그 아무것이란 게 말 한 마디인 경우도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건네는 따뜻한 말 한 마디가 다시 삶을 살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서로에게 소중한 것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것이 세상을 사는 지혜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세상에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겠죠. 아무것이라는 말은 정해지지 않았다는 뜻이지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모르는 특별한 것일 수 있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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