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중시 양가 반대 설득해 '추수감사 웨딩' 문화 축제로 하객들 "2000년전 혼인 연상"
서기 48년 금관가야국에서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국제결혼이 성대하게 열렸다. 주인공은 시조 김수로왕과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황옥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따르면 허황후가 아버지의 선몽을 받아 김수로왕과 혼인하기 위해 무려 2만5000리(1만km)에 이르는 바닷길을 건너왔다고 한다.
지난 23일 최첨단 IT 도시 실리콘밸리서 약 2000년 전 그들의 역사적인 러브스토리가 재현됐다.
한인 문선호(27)씨와 인도계 미국인 헤일리 파텔(25)씨가 지난주 백년 가약을 맺었다.
"처음 신부를 봤을 때 김수로왕과 허황옥 공주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하늘이 정해준 인연이라 불리는 그들처럼 우리도 깊은 인연이란 생각이 들었다."
3년 전 실리콘밸리 지역에서 IT 엔지니어링 분야 근무를 하던 문씨는 신입 사원 파텔을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뼈대 깊은 양반 가문인 남평 문씨 집안 장손과 인도 카스트 계급의 높은 층에 속하는 '파텔' 가문의 자제로서의 만남은 녹록지 않았다.
카스트 제도의 잔재가 남아있는 인도인들에게 결혼은 부모 허락이 절대적이며 배우자의 집안 등 여러 조건을 까다롭게 따진다. 특히 높은 계급에 속했던 파텔의 경우 다문화 결혼이라는 건 생각도 못한 일이였다고 했다.
전통을 중시하는 양반 가문의 자제로 태어나 조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문씨 역시 결혼 상대를 고르는 일에 집안 어른들의 승낙은 필수였다.
높은 문화장벽에 '조건'만으로는 승산이 없었던 문씨 커플은 '진심'으로 승부했다고 한다. "결혼이 가문 대 가문의 결합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사랑하는 남녀의 삶을 결정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양가 부모님들께 문화를 넘어서 서로 인생의 동반자로서 사랑하고 아끼며 살아가겠다는 진심을 보여 드렸고 결국 결혼 승낙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결혼 승낙과 함께 문씨 커플은 '가문의 전통' 때문에 서로의 집안 행사에 두배 더 바빠졌다. 힌두교 중에서도 사회봉사 및 헌신을 추구하는 '수와미나라얀(Swaminarayan)' 종파 신자인 파텔을 따라 문씨는 사원에 종종 방문해 자원봉사도 하고 다른 신도들과 교제의 시간도 가져야 했다. 특히 인도의 대명절이자 힌두교 최대 축제인 '디왈리(Diwali)' 때는 사원은 물론 파텔의 가족과 친지들이 모이는 자리에 동행은 필수였다. 파텔 역시 추석 제사나 조부 묘사 등 문씨 집안의 행사나 명절에 문씨와 대동했다.
문씨는 "서로의 문화를 체험하면서 각자의 문화 속에 숨겨진 가치들과 본인의 문화와 유사한 점을 발견했고 서로를 더 깊게 알아가는 계기가 됐다. 특히 양국의 음식 문화를 접하면서 입맛까지 바뀌었을 정도"라고 말했다.
파텔은 문씨를 만나면서 한식의 매력에 푹 빠져 평소 김치, 비빔밥, 순두부 등을 즐겨먹는다고 한다. 문씨 역시 채식주의 위주 식단을 고수하는 인도문화에 따라 우유와 치즈로 맛을 낸 인도 전통음식과 향신료 강한 음식들에 매료됐다.
지난 추수감사절 연휴 기간 열린 이들의 결혼식은 문화 대축제를 방불케 했다. 한국과 인도 양국에서 그리고 미국 전국에서 수백 명의 다국적 하객들이 모였다. 결혼식 의상만 3벌. 인도 예식으로 진행되는 본식과 함께 미국 스타일 결혼식 피로연, 한국의 폐백까지 진행됐다.
문씨는 "이색 결혼식이라 식장 데코레이션부터 DJ까지 일일이 우리가 직접 선택했다. 양가 집안의 문화를 존중하면서 모든 하객들과 함께할 수 있는 결혼식을 원했다"고 말했다.
결혼식 첫 순서로는 신랑이 신부의 집에 화려하게 행차하는 인도 전통 '바랏(Baraat)'에 따라 이날 문씨는 하객들의 환호를 받으며 스포츠카를 타고 식장에 입장했다. 이어, 화려하게 장식한 인도식 주례단 '만답'(Mandap)에서 주례와 함께 '성스러운 불(Holy Fire)'이라 불리는 불 앞에서 힌두 의식을 거행했다. 이는 신들 앞에서 영원하게 서로를 사랑하겠다는 다짐하는 의미다.
이후, 팝송에 맞춰 턱시도와 드레스를 입고 피로연 댄스를 선보인 문씨 커플은 저녁이 되자 폐백 차림으로 등장했다. 푸른 관복을 입고 늠름하게 입장하는 문씨 뒤로 붉은 족두리를 쓴 파텔이 수줍게 등장했다.
아들 딸 많이 낳으라며 어르신들이 덕담과 함께 대추와 밤을 던지는 모습이나 신랑이 신부를 업고 한바퀴 도는 등 이색 퍼포먼스에 신부 가족들과 하객들에게 모두 축제 분위기였다고 한다.
문씨 부부는 각 국을 여행하면서 다른 문화들도 알아갈 예정이라고 한다.
문씨는 또한 결혼을 생각하고 있는 다문화 커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배경'이 아닌 '진심'이라고 조언했다. "다문화 커플일수록 서로의 문화나 전통에 대해 존중하는 세심함이 필요해요. 피부색과 문화가 아닌 마음을 나눌 평생의 동반자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