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을 정확히 파악하려면 숲과 나무를 보고 균형을 맞추어야 하는데 어느 것에 편중하느냐에 따라 '근시안적' '원시안적'이라는 표현을 쓴다. 나는 어디든 처음 방문하는 곳은 지도를 펴놓고 전체 지역에서의 이곳 위치가 어디냐를 먼저 파악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초등학교 국어 과목 배울 때도 한 과를 읽고는 저자가 무슨 메시지를 주려는 것인지 전체의 뜻을 요약하라는 숙제를 좋아했던 것 같다.
그 습관이 모든 것을 대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어서 나무를 보기 전 큰 틀의 숲을 먼저 보는 스타일이다. 성경도 개개 구절 자체보다도 무슨 가르침을 주고 싶은 의도의 말씀인지 큰 틀을 먼저 파악하려고 한다. 전체 숲을 먼저 보기 전 나무만을 세밀하게 보려는 시야는 편향된 사상, 학설, 교리 등을 만들어내는 우를 범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로 대한민국이라는 전체 숲과 고향이라는 나무 어느 것에 더 중점 두느냐에 따라 애국자로도 반대로 나라를 분열시키는 지방색 분자도 된다.
성경 '율법'에 관한 기록을 읽을 때도 나무로서의 관점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열심히 지켜야 되는구나'인데 반해 국어 숙제식 큰 뜻 요약하는 숲을 우선하여 보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노력해도 지킬 가능성이 없음을 깨닫고 다른 길을 찾아라'는 메시지구나 하는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한다.
산꼭대기에 올라서서 성경이라는 숲을 내려다보는 시야에서 파악되는 하나님의 뜻,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목적을 단어 하나로 쓰라면 그 답은 '구출'이다.
그러기에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보는 관점도 숲을 보는 사람은 고기 구출을 위한 주 활동 무대는 고기들이 있는 밖이요 교회는 그 활동을 위한 공부나 어부끼리의 단합을 위한 교제로 힘을 충전 받는 곳으로 보는 반면 나무를 중점으로 보는 사람은 24시간 교회에서 파고 사는 생활로 보게 되는 것 같다.
소방관의 임무를 전체 숲 관점에서 본다면 불타는 건물 속에 갇힌 사람 '구출'이 먼저요 세세한 나무 하나하나는 그 다음이다. 그러기에 소방서장의 입장은 구출 이후에 할 일이 부족한 것은 용납될 수 있겠지만 불에서 구출해 내는 일 자체에 소홀하면서 다른 보조 역할 일들은 많이 하면 할수록 오히려 직무 태만이 될것이다.
즉 본업인 구출은 소홀히 한 채 신앙생활이라며 바쁘게 하고 있는 것은 숲은 도외시한 채 나무에만 집착하는 근시안으로 열심히 하면 할수록 오히려 감점이 되는 생활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계가 저지르고 있는 가장 큰 실수와 잘못 중 하나는 자기 소관 건물의 불 속에서 아우성치고 있는 사람의 구출은 도외시한 채 옆 건물 소방관을 간섭하고 정죄하는 일이나 자기 개인 수양이나 성화에만 집중하는 근시안적 생활인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출에 열심인 사람과 구출에는 별 관심 없이 오로지 구출법 공부나 자기 개인 수양에만 열중인 사람 중 어느 편에 더 높은 점수를 주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