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브루클린 뮤지엄에서는 지난 2월 8일부터 시작해서 오는 5월 12일 끝나는 특별전 '프리다 칼로: 겉모습은 속임수가 될 수도 있다(Frida Kahlo: Appearances can Be Deceiving)'가 계속되고 있다. 멕시코의 초현실주의 화가로 일컬어지는 프리다 칼로는 생전에는 21살 연상의 멕시코 문화의 대부, 유명한 벽화 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젊은 아내 정도로 여겨졌다. 그러다 1970년대에 페미니즘이 부상하면서 재조명된 그녀의 특별한 작품 세계는 20세기 멕시코 예술과 페미니즘의 아이콘이 되었다.
나는 프리다 칼로를 정말 존경하고 좋아한다. 내가 두 번이나 갔던 멕시코 시티 근교의 프리다 칼로 뮤지엄은 그녀의 아버지가 지어준 집으로, 그녀가 결혼 후 죽을 때까지 살던 집이다. 프리다가 벽을 블루 색으로 칠해서 사람들은 그 집을 지금도 '블루 하우스'라 부른다.
전시회는 프리다 칼로의 작품이 주가 아니고 마치 그녀의 생애 다큐처럼 프리다에 대한 디테일이 대단히 큰 규모로 전시돼 있었다. 남편인 디에고와 그녀의 시대별 사진들이 꽤 많아서 사진사였던 아버지가 찍은 것만도 40여 점이나 된다. 특히 연인이었던 니콜라스 머레이가 찍은 많은 사진들은 농염과 환희로 터질 듯한 칼로의 아름다움이 얼굴에서 후광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림과 글로 꼭꼭 채워진 그녀의 일기장, 소품들, 편지, 착용했던 장신구와 쥬얼리들, 동화처럼 앙증맞게 예쁜 구두와 부츠, 화장품과 복용한 약들, 매니큐어 그리고 그녀가 의대에 입학한 18살에 난 교통사고로 척추를 다쳐 평생 사용한 철제와 석회, 나무 코르셋들. 그녀는 처음에 이 코르셋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손때 묻은 코르셋엔 그림으로 공간이 다 채워져 있었다. 한 벽엔 그녀가 수집해서 소장했던 멕시코 토속품들이 가득 했고, 특히 그녀가 평생 애용한 화려한 멕시코 전통의상 테바나(Tehuana)가 패셔니스타 답게 정말 많았다. 테바나는 그녀의 멕시코에 대한 애착의 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6살 때 걸린 소아마비로 불편한 다리와 교통사고로 다친 몸 커버에 유용했다. 무엇보다 디에고가 집착했던 의상인 걸 보면 이혼했다가 두 번이나 결혼할 만큼 애증이 함축된 두 사람의 관계가 유추된다. 칼로 사후 3년 뒤에 세상을 떠난 디에고가 생전에 칼로의 옷과 소지품을 창고에 보관하고 15년 후에 공개하라고 유언했다는데, 2004년 미술사학자가 칼로의 의상, 액세서리, 약품장과 그 외 소지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공개된 칼로의 옷장은 곧장 칼로 신드롬으로 이어졌다.
소아마비로 나중엔 다리를 절단해야 했으며 척추에 쇠막대가 관통한 교통사고로 수술을 35번 이상이나 하며 평생 코르셋을 착용해야 했던 장애인 칼로는 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 중에도 거울을 보며 자화상을 그리고, 그 찢어지는 심정을 침대 위에서 그림으로 변주곡을 완성했다. 보통사람은 상상 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이 그녀의 사는 법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또 한 사람의 여류화가 까미유 끌로델은 로댕에게 버림받자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30년 동안 정신병원에서 고생하다가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두 사람을 비견하는 건 아니지만, 자신의 찢어질듯한 고통과 슬픔을 그림을 통해 표출해내면서 강인하게 자신의 생의 의미를 작품으로 비문처럼 한 땀 한 땀 새겨놓은 칼로의 생애는 화려하다 못해 황홀하기 짝이 없다. 누가 그랬던가. 내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내가 내 인생의 의미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고통의 극치를 아름다움의 극치로 진화시키는 칼로의 용기 넘치고 힘 있는 자아가 진실로 멋있고, 부럽기 짝이 없다.
프리다 칼로에 취한 우리는 멕시코 식당에 가서 데킬라로 만든 칵테일 프리다를 마시며 칼로의 황홀한 사는 법을 건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