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사태가 지나가면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여행’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당연한 일이다. 답답한 집구석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행! 말만 들어도 가슴 설레는 단어다. 그런데 내 경험으로 보면 여행과 관광이라는 낱말을 구분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한국의 표준국어대사전은 이렇게 구분해서 정의하고 있다.
여행=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
관광= 다른 지방이나 다른 나라에 가서 그곳의 풍경, 풍습, 문물 따위를 구경함.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여행과 관광을 별로 구분하지 않고 혼용한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주된 여행 목적이 다른 지역의 문물을 체험하는 관광이기 때문이다. 영어에서도 여행과 관광을 뜻하는 단어가 따로 있지만 영어권의 사람들도 두 용어를 혼용한다고 한다.
내게는 여행과 관광은 확실히 다르다. 나의 경우 미국 서부지역은 직접 차를 몰고 식구들과 ‘여행’을 했고 유럽이나 중국, 남미 등은 관광회사의 단체관광을 따라다녔다. 혼자서 여행할 만한 여유나 능력이 없으니 단체관광에 끼어 다닐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남들 다 가는 명소에 “나도 가봤다”는 식의 인증사진 찍기 관광….
그에 비해 여행은 유명한 곳이 아니라도 나만의 깊은 인상을 남긴다. 데스밸리의 미묘한 황량함, 요세미티의 편안함, 캘리포니아 해안 도로를 달리며 바라보는 태평양….
오래 전 한국에서 온 손님을 대접할 겸해서 팜스프링스 근처의 예술가 마을 아이딜와일드에서 며칠을 지낸 적이 있는데 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가 10월초였는데 뜻밖에도 함박눈이 펑펑 춤추며 내리는 것이었다. 눈다운 눈 구경을 못하고 살다가 장엄한(?) 눈경치를 보며 한 잔 하며 나눈 대화는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바로 이런 것이 단체관광에서는 맛보기 어려운 여행의 참 매력아 아닐까?
내가 이렇게 여행과 관광을 구분해서 생각하자는 것은 예술감상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요새 사람들은 예술작품을 관광명소 휙 돌아보고 서둘러 인증샷 찍는 듯하고는 감상했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많다.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임시방편으로 등장한 ‘비대면 온라인 공연’이니 ‘온라인 전시회’ 등이 그런 경향을 부추기는 것 같다.
하지만 그건 세계 명작을 다이제스트판으로 읽고 그 작품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처구니없는 착각이다. 나 자신이 바로 그런 피해를 겪었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건 정말 엄청나게 슬픈 착각이다.
어릴 적 우리 집이 헌책방 겸 대본소였던 덕에 나는 장발장, 돈키호테, 전쟁과 평화 등의 세계 명작을 어린이용 전집으로 닥치는 대로 읽어치웠다. 그리고 나이 좀 들어서는 그건 벌써 읽은 작품이라고 여기는 건방을 떨었다. 그 손해가 얼마나 큰 것인지는 나중에야 뼈저리게 깨달았다.
예술 감상도 꼭 마찬가지다.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관광’하듯 남들이 다 보는 유명한 작품을 대충 훑어보는 것에서 벗어나, ‘여행’하듯 내 마음에 들고 공감할 수 있는 작품과 깊고 차분하게 교감해야 한다. 작품과 나 사이에서만 가능한 대화를 나누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