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 출신 드림웍스 입성 한국인 1호…한인들 실력 인정받아 이젠 20여명 활동 모델링이란 디테일 살리는 섬세한 작업…최종 목표는 '비주얼 이펙트 수퍼바이저'
글렌데일 5번 프리웨이 인근에 자리한 드림웍스(Dreamworks) 스튜디오. ‘슈렉’, ‘쿵푸팬더’, ‘마다가스카’, ‘샤크테일’ 등 남녀노소를 불문한 전세계 모든 사람들을 웃고, 울고, 꿈꾸게 만드는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만들어진 ‘꿈의 공장’과도 같은 곳이다.
아기자기하게 정돈된 수목들과 작은 폭포, 연못에 뛰노는 잉어들까지, ‘회사’라기 보단 차라리 ‘공원’에 가까운 이 곳은, 최근 개봉한 ‘드래곤 길들이기’(How to train your dragon)의 이미지들로 더욱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었다.
작품 콘셉트에 맞는 갖가지 재미난 장식품들이 스튜디오 이곳 저곳을 장식하고 있는 풍경은, 개봉 2주 만에 전국적으로 약 9200만 달러의 수입을 올리며 평론가들의 극찬과 영화팬들의 사랑을 동시에 거머쥔 ‘드래곤 길들이기’의 흥행 성공에 대한 자축의 느낌이 배어 나왔다.
이곳에서 허현 모델링 수퍼바이저를 만났다. 그는 '드래곤 길들이기' 작품 전체에 입체감과 생생함을 입힌 모델링 분야 총 책임자다.
허 팀장에게 "도대체 모델링이 무엇이냐"고 먼저 물었다. "간단히 얘기하면 컴퓨터 안에서 조각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과거 디즈니의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라이온 킹'같은 작품들이 평면적인 그림들을 빠르게 이어 만든 애니메이션이라면 '슈렉'이나 '토이 스토리' 시리즈 같은 최근의 애니메이션들은 모두 2차원 화면 안에서도 3차원적인 입체감을 지니고 움직이는 시각효과를 지닌다는 차이점을 느낄 수 있다. 이를 위해 허현 팀장이 지휘하는 '모델링' 아티스트들이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캐릭터 하나부터 배경의 나무 하나까지도 일일이 작업을 하는 것이다.
최근 들어 3D가 보편화 되면서 화면의 깊이까지 느낄 수 있게 되고 입체적 디테일에 대한 요구도 커지면서 모델링 작업의 중요성도 또 한층 커지고 있다.
"캐릭터 디자이너가 스케치를 해오면 그것을 컴퓨터 안에서 360도 모형으로 빚어내는 거죠. 애니메이션을 평면에서 입체로 끌어내는 첫 작업이에요. 기하학적인 구조를 짜주는 일이라고 할까요? 모델러가 되려면 '셰이프'(Shape)를 보는데 있어 예술적 눈과 조형적 감각을 갖춰야 하고 디테일을 얼마나 적절하게 넣고 뺄 수 있는지의 여부가 중요하죠."
허현 팀장은 1.5세2세가 아닌 유학생 출신으로 드림웍스에 입성한 제 1호 한국인이기도 하다. 그를 통해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한국인의 가능성이 높이 평가되기 시작했고 이제 그가 열어 준 문을 통해 기회를 잡아 드림웍스에 입사한 한국인은 20여명에 이른다.
허현 팀장은 "그냥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한국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홍보일을 하다 매너리즘이 찾아왔을 무렵 '터미네이터'를 보고 영화 특수 효과에 대한 막연한 관심을 갖게 됐고 97년 조지아주 사바나 칼리지 오브 아트 앤 디자인으로 유학의 길을 택했다. 그곳에서 컴퓨터 아트를 공부한 후 시카고의 '빅 아이디어'라는 프로덕션을 거쳐 2003년 드림웍스에 입사하기까지 모든 것이 시기적으로 맞춤맞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드림웍스가 허현을 선택했던 것 같냐"고 묻자 "싸서 아닐까요?" 라는 장난스런 답변이 먼저 돌아왔다. 하지만 사실은 '실력과 노력'이 답이었다.
"전 사실 아직도 영어가 자유롭지 않아요. 그래서 어떤 설명보다도 가장 멋진 최종 작품을 그냥 보여주는 수 밖에 없었어요. 그게 날 가장 잘 보여주는 방법이었죠. 이 분야에도 말만 잘하는 사람들 근사하게 포장만 잘하는 사람들은 분명 있어요. 저나 다른 한국분들은 어줍잖은 말로 커버할 수가 없으니 열심히 해서 실력으로 보여주는 수 밖에요."
많은 애니메이션 학도들에게 그렇듯 허현 팀장에게도 드림웍스는 '꿈의 회사'였다.
"처음 왔을 때 '세상에 이런 회사가 다 있구나' 싶었죠. 모두가 여유로운 모습이었고 그래서 정말 일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어요. 제프리 카젠버그(드림웍스의 설립자이자 CEO)의 인재에 대한 투자가 정말 놀랍단 생각이에요.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창의적인 환경을 만들어주니까요. 회사 안에 오락실에 요가 클래스도 있고 아티스트들 책상 꾸미라며 회사에서 200달러씩 주고 안젤리나 졸리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왔다 갔다 하고 CEO건 누구건 다 같이 식당에 앉아 점심을 먹을 때면 참 여러가지면에서 직원에게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는 회사란 생각이 들어요."
'샤크테일'에서 시작해 '마다가스카' '오버 더 헷지' '플러시' '쿵푸팬더' 그리고 '드래곤 길들이기'까지 드림웍스의 거의 모든 작품이 허팀장의 손을 거쳤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쿵푸팬더'다.
"기본적으로 아이디어가 신선했고 동양적인 느낌이 묻어나는 작품이다 보니 제 의견을 넣을 수 있는 여지도 많았죠. 같이 일한 팀도 정말 뛰어난 사람들로 꾸려졌었어요. 특히 전설적 캐릭터 디자이너 니콜라스 말렛과의 작업이 재미있었죠. 처음엔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 줄 모르고 '네 의견이 맞네 내 의견이 맞네'하며 엄청 싸웠는데 이젠 좋은 친구가 됐어요."
최근작 '드래곤 길들이기'에 대한 애정도 크다. 개봉 첫 주말 동네 극장 관객들이 다함께 웃고 박수를 치며 신나게 감상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영화의 한 부분이란 사실이 그렇게 자랑스러웠단다. 스토리가 탄탄한 작품이란 점도 '드래곤 길들이기'에 마음이 가는 중요한 이유다.
"이제 애니메이션도 '스토리'로 승부하는 게 트렌드에요. 비주얼만 화려하거나 오직 웃기려는 의도로 몸개그만 난무하는 작품들은 더 이상 성공하지 못할 겁니다."
그가 생각하는 한국 애니메이션의 약점도 바로 '스토리'다.
"미국은 스토리팀 여러 명이 머리를 맞대고 하나로 움직여 '모두가 일반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수준'의 이야기를 만들어내요. 하지만 한국은 감독 한 명이 좌지우지하는 경향이 크다 보니 아무리 비주얼이 좋아도 스토리는 약하죠. 또 마음들이 너무 급해요. 여기선 보통 한 작품 준비하는데 3~4년이란 시간을 두고 8000만 달러씩 투자하고 기다려주는데 한국에선 그런 마인드를 기대하기가 힘들죠."
일본 애니메이션 역시 스토리의 한계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대중적 사랑을 받긴 힘들다는게 그의 생각이다.
"일본엔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걸출한 스토리텔러가 있긴 하지만 이야기 자체가 '동양적'으로 머물고 있어요. 때문에 세계 관객에게 공감을 얻긴 힘들고 매니아들의 사랑받는데 그치는 겁니다."
허현 팀장에게 또 다른 '꿈'을 물었다. 많은 애니메이션 아티스트들이 그렇듯 그도 애니메이션 감독을 꿈꾸겠거니 했지만 허 팀장은 "감독은 내 재능의 영역이 아니더라"고 말한다.
"그냥 비주얼을 '이쁘게'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색감 여백의 미 실제적 디테일을 잘 살리면서도 모든게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거죠. 굳이 꿈을 꿔 보자면 애니메이션 전체의 영상을 책임지는 '비주얼 이펙트 수퍼바이저'가 되고 싶은 정도랄까요? 이 치열한 경쟁의 세계에 뛰어 들고 싶어하는 많은 한국인 후배들에게도 좋은 선배가 돼 주고 싶어요. 애니메이션의 여러 분야 중 자기에게 맞는 한 분야를 찾아 내 열심히 하라고 말해주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