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중앙일보

광고닫기

[피플@비즈] 토마스 김 맥시건설 대표

New York

2010.05.11 17:45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기사 공유
학비 마련 위해 공사장서 막일…20년 만에 병원 건축 전문가로
'막일꾼’으로 건설업에 발을 들여놓은 뒤 병원·수술센터 전문 건축회사 대표로 자리잡은 한인이 있어 화제다. 주인공은 토마스 김(56·맥시건설)씨로 불경기 속에서도 수백만달러짜리 공사를 잇따라 따내 눈코뜰새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김 대표를 만난 건 자정이 가까운 시각 중부 뉴저지 플로람파크 수술센터에서였다. 1년 전 시공한 센터에서 40만달러 규모의 에어컨이 고장나 이를 해결해 주기 위해 간 것이다.

현장의 유일한 아시안인 그가 10여명의 백인을 향해 이것저것을 지시하고 있었다. “케이블은 이곳에 연결하고, 공기 흐름은 이쪽으로 하는 게 좋겠어요.”

기술자들은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조심스럽게 작업을 이어갔다. ‘수술센터’라는 특성상 김 대표가 모든 책임을 지고 작업을 마쳐야 했기에 그의 말은 곧 법이었다. 특히 이 센터에는 다음날 크고 작은 수술 65건이 잡혀 있었기 때문에 김 대표의 책임감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수술만 전문으로 하는 센터의 10여개 수술실은 온도를 늘 65도로 맞춰야 합니다. 단 1도의 차이도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좋은 에어컨을 써야 하고 케이블 하나에도 신경을 써야 하죠.”

김 대표는 모든 수실실 온도가 맞춰진 것을 확인한 뒤에야 집으로 돌아 갈 수 있었다. 다음날 동틀 무렵이었다.

막일꾼에서 병원 공사하기까지=김 대표는 자타가 공인하는 ‘병원·수술센터’ 건설 전문가다.

지금까지 뉴저지주와 펜실베이니아에서 12곳의 종합병원과 수술 전문 센터 공사를 진행했다. 필라델피아 토마스 제퍼슨 병원, 뉴저지 패스캑 밸리·홀리네임 병원 등이 그의 손길을 거쳤다.

이밖에 개인 병원도 20여곳이나 시공했다. 종합병원의 경우 대부분 진료실 등의 공사였고 수술센터는 모든 공사를 도맡아 했다. 공사비는 300만~900만달러. 기간은 보통 1~2년이다.

그가 처음부터 병원 건축 전문가였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건설’의 ‘건’자도 모르는 초자였다.

컴퓨터 관련 일을 하던 김 대표가 미국에 온 건 1985년. 전공 관련 공부를 더 하려던 김씨는 여느 유학생과 같이 수퍼마켓, 음식점 등에서 일을 하며 학비를 마련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필라델피아 기차역사 공사현장에서 일을 하게 됐다. 그야말로 ‘노가다’였다 수년간 현장에서 일을 배우던 그는 1991년 독립을 선언했다.

“일을 할 때도 단순 기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업가적인 관점’에서 보려고 노력했어요. 물건은 어디서 들여오고 인부들은 어떻게 부리고…. 언젠가 독립을 생각했던 것이죠.”

그의 전략은 우선 기차역사 집중 공략. 이 전략이 먹혀 성공가도를 달리면서 펜실베니아 기차역사 소매점 공사를 맡아 했다. 하지만 1997년 대형 교통사고로 은퇴 기로에 놓이고 말았다.

새로운 기회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왔다. 필라델피아 토마스 제퍼슨 병원 앞에 아내가 운영하던 꽃가게를 찾은 병원 관계자에게 병원 공사에 관한 아이디어를 제공하자 공사를 맡아 달라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진심은 어디서나 통한다=막막했지만 최선을 다했다. 이후 그의 ‘성실함’과 높은 ‘완성도’는 입소문을 탔다.

김 대표는 “아무래도 병원은 민감하고 꼼꼼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세밀한 접근이 필요하다”며 “게다가 한인 특유의 완벽함이 작용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한 플로람파크 수술센터에서의 일화 하나. “병원의 얼굴인 리셉션 데스크와 보호자 대기실 공사에서 결과물이 맘에 안들어 부수기를 5번이나 해 6번째 만에 완성했죠. 병원에서도 저에 대해 다시 봤다고 하더라고요.”

더불어 공사 뒤 무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도 큰 장점이 됐다.

불황 무풍지대=이 때문에 그에게는 ‘불경기’란 단어가 없다. 이제 곧 뉴저지 몬로 수술센터 시공에 들어갈 예정이며, 타주에서도 문의가 계속 들어오고 있다. 의대에 다니던 아들은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며 공대로 편입해 졸업을 눈앞에 두고 있다.

김 대표는 “운도 있었지만 병원이라는 전문분야에 성공하기 위해 주정부의 수백장짜리 건설 규정을 외우다시피 했다. 병원 전문 기술자들과도 늘 만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나눴다”고 말했다.

물론 어려움도 있었다. 아시안으로서 유대인이 장악하고 있는 병원 건설업에 뛰어들어 무시도 당했다.

그래도 “업계에서 유일한 한인이라는 자부심으로 일한다”는 김 대표는 “1.5·2세들도 생소하지만 가능성이 무한한 분야에 진출하는 경우가 늘었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강이종행 기자 [email protected]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