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표정한 얼굴에 꼭다문 입술,
동그라미를 자로잰 듯한 눈동자들…
아버지의 이십년 삶이 그랬듯이 아버지의 조각품들은
거의 같은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초상화 주문도 예전 같지가 않았다. 80년대 중반들어서면서 미군들이 서서히 본국으로 돌아가 파주부대에도 미군들이 줄어드는 추세였다. 그렇다고 평생을 그림만 그린 아버지가 한국에서 다른걸 시작하기도 막막한 상태였다 나중에 아버지는 남편에게 그 당시엔 어쨌든 미국에 가기만하면 그곳에 정착을 하리라고 마음을 이미 먹고 있었다고 하셨다. 아버지가 미국에 와 보니 영희누이가 사는 것도 그다지 여유있어 보이지 않았는데 어쨌든 아버지에게 미국은 아버지 반생의 나머지 기회였다. 그 무렵 아버지는 호세라는 쿠바사람이 운영하는 스테인 드글라스와 소형조각을 만들어 파는데 취직을 하게 되었는데 약삭빠른 호세는 아버지가 조각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곧바로 간파했다. 그래서 주급 200불을 주고 아버지를 정식직원으로 채용했다.
그 무렵 호세는 몇 군데에서 야외용 조각을 주문받았는데 아버지에게 그걸 만들라고 했다. 아버지는 시간에 관계없이 밤낮으로 일을 해서 주문날짜에 맞추어 조각들을 만들었는데 그 조각들의 가격에 비하면 호세가 아버지에게 쥐어 주는 돈은 너무 터무니없이 작았다. 그 주문받은 조각품 중 하나는 미국의 초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 상이었다. 클레모어에 위치한 라저스 칼리지에서 주문한 조각이었다.
이 대학은 웨스트 포인트출신의 로저스라는 사람이 건립한 대학이었는데 학생수는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학교를 졸업한 동문들이 제법 그 부근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 동문들이 펀드레이징을 해서 별 특징없이 밋밋한 캠퍼스에 조각품을 하나 세우기로 했다. 아버지가 대형조각을 하게된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버지의 조각방식은 약간 특이했다. 일단 그림으로 조각을 데생한 다음 철근으로 전체적인 윤곽을 잡았다. 철근을 끊어내고 구부리고 오므리고 하는 작업이 마치 철공소일를 방불케 했다. 그런 다음 켈스톤을 물에 개어 시멘트 바르듯 발라나갔다. 어떻게 보면 예술을 한다기보다 집을 짓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의외로 드넓은 미국에서 이런 대형조각을 하는 사람들이 드물었다. 대부분의 실내용 대리석 조각은 이태리에서 수입을 해오고 정원용이나 묘지에 설치하는 조각들은 예술성보다는 실용성 위주의 장식용 조각들이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되어 팔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3개월 만에 토마스제퍼슨을 완성했다. 켈스톤으로 만든 조각은 훨씬 섬세한 표현을 할 수 있어 토마스 제퍼슨의 얼굴은 실물사진과 흡사했고 또한 토마스 제퍼슨이 취임식에 입었다는 연미복은 바지의 주름까지도 표현될 정도로 입체감이 있었다. 대학 학장은 몹시 흡족해서그뒤 조지 워싱턴 상을 하나 더 만들어달라고 아버지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학교측에서는 아버지에게 레지던트 아티스트라는 직함을 주며 사택과 생활비를 제공했다.
아마도 그때가 아버지 인생에서 제일 황금기라고 할 만했다. 한국에서 온 한 무명의 초상화가가 미국엘 와서 영주권을 받고 대학의 레지던트 아티스트가 된것이었다.
내가 남편을 만난 것은 그 무렵이었다 당시 나는 미국에 와서 운전면허시험을 세번 연속 낙방하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였다. 이곳에서는 운전을 한다는 것은 걸을 수 있다는 의미와 비슷하다. 가뜩이나 운동신경도 둔한데다 한국에서는 운전대 한번 안 잡아보고 이민을 온 것이다.
내가 이민 올 80년대 후반만 해도 한국은 자가용이 그렇게 흔치 않던 때였다. 더구나 결혼도 안한 미혼의 직장인이 운전을 하는 경우는 더더욱 흔치 않았다. 늘 그렇치만 참으로 막연하다는 것이 사람을 잡는경우가 많다.
당시 미국이란 나라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던 지식은 참으로 막연하고 뜬구름 같은것 이어서 무조건 잘 사는 나라였다. 그 잘산다는 의미가 부자집에서 잔치상을 차려놓고 나를 기다리는 의미로 받아 들였는지 난 미국을 가기 위해 준비한게 거의 없었다. 더구나 처음에 내가 당도할 목적지가 캘리포니아임에도 불구하고 겨울옷만 잔뜩 싸가지고 온 걸 보면 거의 한심한 수준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미국와서 처음 석달은 캘리포니아 언니집에 있다가 간호원으로 있던 선배가 있는 오클라호마로 가게 되었다. 그 곳에서 다시 간호학공부를 할 예정이었다.
오클라호마는 캘리포니아보다는 주가 작고 시골이어서 학비나 생활비가 싸다는게 선배의 충고였다. 당시 나에게는 한국에서 간호원 근무를 하면서 모은 돈 기천불이 전재산이었는데 운전면허 레슨으로 이미 천오백불이 넘게 지출이 된 상황이었다. 선배는 너처럼 둔한애는 처음이라고 했다. 자기도 두번 째는 기를 쓰고 연습해서 붙었는데 어찌 세 번을 늦가을 낙엽 우수수 떨어지듯이 그렇게 연속으로 떨어지는지 그런 애는 처음이라고 했다. 그래도 필기는 딱 한번에 붙었는데 실기를 보러가서는 시험관만 보면 주눅이 들어 가뜩이나 안되는 영어가 더 안됐다. 오죽하면 여자시험관이 페러럴 파킹을 해보라고 하자 "예써"하고 대답을 했을까?
그날 시험은 5분도 안되어 끝이 났다. 그러다 보니 오클라호마엘 여름에 왔는데 가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선배네에서 누구를 저녁초대를 한다고 하면서 부산을 떨었다. 선배네와 친한집 아들이라고 했다. 그 아들은 운동을 하다왔는지 태극기 문양이 그려진 하얀 티셔츠에 빨간 다우다 반바지를 촌스럽게 입고 선배네집으로 들어왔다.
교민 축구시합을 하다가 오는 길이라고 했다. 남편은 첫 인상도 그렇거니와 사람이 참 편안해보였다. 너무 편안해보여서 마치 한국에서부터 알던 옆집 오빠같은 인상이었다. 선배네와는 막역한 사이인지 선배네도 친동생 대하듯 했다.
그러고 며칠후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기가 운전을 가르켜줄테니 다시 배워보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십년전 텍사스로 이사올 무렵 아버지는 오클라호마주를 떠나 아칸소 주로 이사를 가셨다. 아버지가 계시던 라저스 칼리지에서는 토마스 제퍼슨 조지 워싱턴 에이브러햄 링컨 등 세명의 대통령 조각이 완성되자 더 이상 주문을 하지않았다. 아버지말로는 학교측의 아트부문 예산이 바닥이 났기 때문이라는데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예나 지금에나 아버지는 당신 조각에 문제가 있어서 일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치 않으셨다. 어쨌든 무명의 한인조각가가 미국대학캠퍼스에 조각품을 세작품이나 완성한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 관계로 털사시의 지역방송에서는 아버지의 조각에 대해서 몇 번 방영을 했고 지역신문 라이프란엔 '열정의 노 조각가'란 제목아래 전면기사가 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아버지의 성공이 생활이 나아지는데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못했다. 아버지는 여전히 가난했고 당신의 재능을 파는 방법도 몰랐다. 학교측에서는 계약이 끝나자 당장 집세부터 내라고 고지서를 보냈다.
그때 아칸소에 사는 어느 크리스천이 소문을 듣고 아버지에게 대형 예수상을 만들어줄 것을 부탁했다. 그는 아칸소 시골에 있는 어느 고아원 원장이었는데 대형 예수상 제작을 위하여 돈을 모금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예수상은 저 브라질의 상파울로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예수상 사이즈로 제작될 예정이라 아버지가 아예 조각이 놓여질 장소로 이사를 해서 그곳에서 제작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오클라호마에서 10년간의 삶을 청산하고 아칸소 주로 이사를 가셨다. 아버지 말로는 리틀 락에서 꽤 많이 들어가는 인구도 몇백명 되지않은 시골이라고 했다. 그런데 집과 생활비와 작품에 소요되는 모든 경비를 제공한다는 말에 아버지는 선뜻 승낙을 하신 것 같았다. 아버지의 생활에서 조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삶의 필수조건이었다.
어떤 환경일지라도 당신이 재료비나 생활을 걱정하지 않고 조각을 할 수 만 있다면 지구 끝까지라도 주저않고 가실 분이었기에 가족들은 아버지의 결정에 반대를 할 수가 없었다. 한편으론 아버지 연세를 생각하면 다소 염려스럽기도 했지만 아버지는 평범한 사람들의 노후의 삶을 포기하신지 오래였다. 그때가 그해 2월쯤이었다.
그런데 그해 사월 어느 새벽에 누가 초인종을 계속해서 눌러서 나가보니 아버지가 처음보는 중년의 백인남자와 함께 서계셨다. 아버지 뒤에는 트럭 비슷한게 보였는데 가까이서보니 유홀 트럭이었다. 아버지는 대뜸 가족이 보고 싶어서 그 산중에서 도저히 살 수 가 없어서 어제 이삿짐을 싸서 밤새 드라이브를 해서 왔노라고 하셨다. 그 아칸소 산중마을엔 인가도 없고 갈만한 곳도 없고 외로워서 살 수 가 없었노라고하셨다.
그러나 난 솔직히 아버지의 갑작스런 출현도 그 이유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냐면 아버지가 아칸소 주로 이사가기 전 그곳에 사전답사를 세번은 갔다 오셨기 때문에 그 곳 사정을 모르고 가신 것도 아니었고 혼자 사시는 것에 익숙한 아버지가 갑자기 가족들이 그리워질 이유가 없었다. 아버지는 가족때문에 당신의 진로를 바꾸실 분이 결코 아니었다. 시어머니가 위암으로 판정받고 누워 계실 때조차도 아버지는 조각만 하던 분이었다. 어머니가 위암말기환자들의 극도의 통증을 호소할 때도 아버지는 별 동요없이 당신 하시던 걸 계속하시던 분이었기에 가족 때문에 조각을 그만 둔다는 것은 아버지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칸소에서 무슨 일이 있었음에 분명했다.
예를 들어 경제적으로 서포트를 해주겠다던 약속이 이행되지 않았거나아버지가 하기 원하지 않는 조각을 만들어 달라고 그쪽에서 무리한 요구를 했거나 예상치 않은 일이 생겼음에 분명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갑작스럽게 아버지 삶의 반경을 바꾼 것을 가족 때문이라고 특히 큰 손주가 보고싶어서였노라고 하셨다.
왜 갑자기 그렇게 큰 손주가 보고 싶으셨을까? 그 애의 돌 때도 이런저런 이유로 안오시고우리가 텍사스에 이사오고 나서 새 집을 장만했을 때도 바쁘시다는 핑계로 발걸음 한 번 안하시던 분이었다. 아버지는 더이상 당신 조각을 원하는 사람들이 없자 가족을 찾으신 것이다.
남편은 평범한 사람이다. 그 평범이 예술에 관한 애정으로 분류된다면 평범 이하일지도 모른다. 남편은 미국에 건너온 뒤로 아버지 대신 가장의 역할을 하고 살았다. 처음 이민와서 다니던 대학도 그만두고 밤엔 청소를 하고 낮엔 주유소일을 했다. 아버지는 라저스칼리지에 레지던트 아티스트란 그럴듯한 명함만 있었지 칼리지에서 주는 생활비라는게 한달 식비 정도였다.
집세는 안냈지만 그외 어머니 약값이나 공과금을 비롯한 모든 생활비를 남편이 벌어야 했다. 남편은 그시절엔 하루에 4시간 이상을 자본 적이 없노라고 했다. 미국의 풍요는 남편에게는 해당되지 않은 풍요였다. 미국에 올 때 남편 집안 재산이란 것은 모두 빚으로 넘어가고 온 가족이 빈몸으로 온 터였다. 그렇다고 오자마자 돈이 나올 데도 없는지라 그저 밤낮으로 일을 해도 생활비 대기에 급급한 생활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생활은 외면한 채 밤낮으로 조각에만 열중해 살았다.
그런 연유인지 남편은 예술이란것에 대해 늘 못마땅해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예술가들이리라. 자신의 이상을 위해 자신의 존재이유를 위해 늘 주변에 희생자를 만드는 사람들이란 게 남편이 생각하는 예술가들이었다.
언젠가부터 아버지는 당신의 꿈을 미켈란젤로에 버금가는 조각가로 정해놓고 미켈란젤로에 대한 책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집안의 벽이란 벽엔 온통 미켈란젤로의 조각품 사진들로 도배되었고 아버지의 꿈은 자식들 교육도아니고 아픈 아내의 병간호도 아닌 미켈란젤로와 같은 조각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신이 되고자하는 미켈란젤로의 꿈에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남편은 아버지와 점점 더 멀어지면서 더욱 더 현실적이 되어갔다 .
내가 시아버지 되실 분을 처음 뵌 것은 여름이 가고 피캉열매가 나무에서 떨어질 무렵이었다.
그날 나는 남편의 권유로 남편집이 있는 클레모어시에서 운전면허시험을 보기로 했다. 남편말로는 시골이라서 운전면허시험이 대도시보다는 까다롭지 않다고 했다. 그날 나는 시험장 가기 전에 남편 집에서 미리 만나기로 약속을 했었다. 남편이 사는 집이 시험장에서 가깝기도 하거니와 남편의 사는 모습이 보고 싶기도 했다. 그날 아침 남편은 자동차 본넷을 열어놓고 뭘 고치고 있는 중이었다. 남편은 아침을 먹지 않았으면 주스라도 한 잔 마시고 가자며 집 안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조그만 계단을 지나 오래되고 낡은 회색문을 여니 바로 부엌이 나타났다.
싱크대 위에 캐비넷 몇 개와 냉장고 냉장고 옆에 스토브가 보였다. 부엌바닥에 카펫도 그렇거니와 낡은데다 언제 청소를 했는지 부엌 내에 있는 것들은 거의 제 색깔을 내고 있는게 없어 보였다. 냉장고 표면도 얼마나 얼룩이 묻었는지 이 냉장고가 원래 하얀 색깔이었는지 베이지색이었는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그 냉장고를 경계로 때묻은 자주색 커텐이 쳐 있었는데 그 곳이 아버지의 작업실겸 리빙룸이었다. 방은 커보이지 않았는데 큰 테이블이 두개나 놓여 있었다.
하나는 긴 사각형 테이블로 어버지가 주로 쓰는거였고 그 옆에 육각형 모양의 식탁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커 보이는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그 방의 사방의 벽엔 아버지의 조각 데생 그림과 미켈란젤로의 조각품 화보 사진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붙어 있었고 그 옆엔 소나무 분재 그림과 그 그림을 설명하는듯한 어떤 도표 비슷한 게 붙어 있었다. 우리가 방에 들어가자 아버지는 책을 들여다보고 계시다가 우리에게 눈길을 돌렸다. 아버지는 혼기가 가득 찬 노총각 아들이 데리고 들어오는 여자를 며느리감으로서의 관심은 거의 보이지 않으셨다. 대뜸 뒷뜰에 있는 당신 조각을 봤느냐고 물어보았다. 아직 못보았다고 내가 대답하자 그것부터 봐야 한다며 뒷마당으로 나를 데려갔다.
리빙룸 오른쪽 구석에 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문을 열자 바로 뒷마당이었다. 뒷마당은 울타리가 없이 옆집과도 연결되어 있고 근처에서 말들을 키우는지 말똥냄새가 진동을 했다.그 마당 한 가운데 커다란 링컨 조각의 골조가 세워져 있었다. 그 조각품의 골조는 철근으로 세워져 있었는데 얼추 봐도 높이가 20피트는 넘어보였다. 난 더구나 키가 작았으므로 한참을 올려다 봐야 했다. 아버지는 이 에이브러햄 링컨 조각이 워싱턴에 있는 링컨 모뉴먼트 다음으로 큰 것이라 아마도 미국 역사에 길이 남을 조각이라며 당신 조각에 관해 거의 한 시간이 넘게 설명을 하셨다.
예술이 뭐 별건가?
인간의 마음 저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순수함과 이상을 끄집어 낼 수 있으면 그게 진짜 예술이지
게다가 아버지가 만든조각품들은 거의모두가 성상이고 외부에 설치할 크기여서 일반 소비자들은 사겠다는 사람이 거의없었고 가끔 장의사나 교회에서 연락이 왔는데 그들은 아주 싼값에 구입하기를 희망하거나, 아니면 전적으로 도네이션을 원했다.그래서 나중엔 남편도 도네이션을 생각했는데 문제는 조각품들이 모두 흩어져 있게 된다는것이었다.남편은 도네이션을 하더래도 한곳에 모아두고 전시를 하거나보존을 할 사람을 찾았다.또한 훗날에 자손들이 아버지조각이 보고싶으면 언제던지볼수있는 그리멀지않는곳에 조각을 두고싶어했다. 특히 큰애는 할아버지의 조각을 좋아했다. 어릴때부터 할아버지집을 놀이터삼아 자라온아이는 자라면서 세상에서 제일 조각을 잘만드는 할아버지조각이 왜 인기가 없는 지 이해할수가 없는 표정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2년이 지났다. 우리는 이시간동안 아직도 아버지의 조각을 처리하지못했다.이런탓에 남편은 여전히 아버지가 세들어살던집 집세를 물고있는 형편이었다.집 주인은 마당에있는 아버지의 조각품들때문에 집을 세놓을수가 없으므로 그 조각품들이 처리될때까지는 집세를 받아야된다고 했다.집주인으로서는 당연한 애기였지만 사람이 살지도않는 집에 집세를 물어야되는 남편의 심정은 그나마 아버지에게 남아있던 희미한 연민의정마저도 사라지게 만들었다.더구나 대부분의 조각품 사이즈가 라이프사이즈 이상되고 켈스톤으로 만든조각품들은 바위처럼무거웠기 때문에 기중기같은 특수장비가 필요했고 인력도 상당히 요구되는일이었다. 그당시 우리는 그 조각을 옮길만한 장소도 없었고. 몇만불이 예상되는 조각이사비용도 엄두가 나지않았다.
마음같아선 예술성을 떠나 아버지의 유작이었으므로 간직하여 후손들에게 보여주고싶은생각도 있었다. 사실 그 조각들은 예술적인가치를 떠나서 아버지의 분신과도 같은것들이었다.이민와서 20여년을 거의 조각만 하고 사셨던아버지였다. . 외로운 이민생활에 가까이 지내던 친구도 없었던 아버지는 필사적으로 조각에만 매달리셨고 해가갈수록 더 큰조각을 하기를 원하셨다.그럴때 마다 남편은 이집은 남의집인데 저 크고무거운조각을 어디로옮기시려고 이렇게 큰사이즈로 만드시냐고 우려를 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조각품한점만 팔면 이런집 사고도남는다고하시며 남편의 우려를 일축해버리시곤했다.
그러나 아버지가돌아가신후 남편의 예상은 생각대로 현실로다가왔고 뒷처리는 또한 어김없이 남편몫이었다 그집은 지금.사람이 살지않는집이었지만 렌트한집이었므로 일단은 잔듸깍기등의 기본적인것은 리스를 한사람이해야되는 입장이었다,여름이면 무더운텍사스날씨에 유독 잘자라는 잔듸를 남편은2년이넘게 깍으러다녔다. 잔듸를 깍고 돌아오는날,남편의 표정은 ,남북전쟁이 끝나고난뒤 새벽 어스름한 들판위를 다리를 절룩거리며 돌아오는 남부패잔병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한사람의 자유를위해선 한사람의 희생이 필요한것인지도 모르는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보이지않는 시간과의 전쟁이 언제끝이나는 냐는것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린치라는 선교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아버지생전에 아버지 의 많지않은 후원자중의 한명이었다. 키가 7피트는 되보이고 백발이 성성한 그레고리팩처럼 미남인 이 훤칠한키의 미국인은 있는재산다 팔아서 남미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있는 60대 백인남자였다. 아버지 생전에 지나가다 우연히 아버지의 조각품들을 보고는 어떤조건도없이 물심양면으로 아버지를후원 해주던 선한 사마리아인같은 후원자였다.그러고보니 그사람을 마지막으로본게 2년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삼일전날 쯤 되었던것같았다. 그는 인상이 비슷한 자기형과같이와서 아버지 마지막가는길을위해 기도를 해주고 장례비용에 보태라며 얼마간의돈이든 봉투를우리에게 주고갔었다.
맞아! 그때 그사람이 나중에 조각품때문에 상의할일이 있으면 연락를 하라고했었는데 왜 우리는 그생각을 못했을까? 무엇때문에 우리는 저 조각들을 이러지도 저러지도못하고 2년을 끌어오며 마음고생을 했던것일까? . 그건 우리의 욕심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우리는내심 아버지조각을 팔아서 생활에 보탬이 되고자했던 마음도 있었고 한편으론 전시할 장소만 제공되면 우리가 보존하고자했던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2년동안 인터넷에 조각품사이트를 오픈해서 구입할사람도찾아보고 나중엔 조각을 전시할 땅이라도 도네이션 해줄사람을 찾아보았으나 그런사람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뒤에 생각해보니 이모든일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위해 생긴일같고, 아버지 20년 삶의표상인 조각들의 운명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미스터 린치라면 누구보다도 아버지조각을 조각품들이 놓여있어야할 제자리를 찾아줄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또한 예술성은 차지하고라도 저만한 성상들이 이부근에는 없으므로 린치같은 크리스챤들에게는 필요한 조각들이기도 했다.어쩌면 린치는 우리들보다 아버지의 조각품이 지니고있는 진정한의미와 가치를 더 잘알지도 모른다.미켈란젤로를 꿈꾸며 살았던 한 동양인노인의 타국에서의 삶과 꿈이들어있는 조각품들이었다..아버지는 생전에 늘 그러셨다.
“ 예술이 뭐 별건가? 인간의 마음 저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순수함과 이상을 끄집어낼수있으면 그게 진짜 예술이지” 그러시면서 예술가중에서 피카소를 제일 싫어하셨는데, 저 피카소의 난해한 그림들은 인간의 감정이나 정서를 혼돈시키기만 할뿐 인간의 자연스런정서와는 맞지않는다고... 우리가 꽃을 보거나 아름다운경치를볼때 나도모르게 감탄이 나오듯 예술도 그래야된다고하시며 추상쪽보다는 구상화를 더 선호하셨고 그런맥락에서 조각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이러니칼하게도 아버지 조각은 아버지이론과는 달리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지도. 사로잡지도못한채 그자리에 그냥 방치되어 있었다.
남편은 오늘 린치를 만나기로 했다. 아버지조각품의 거취를 최종상의하기위해서이다.지난번 통화에서 도네이션의사를 밝혔기때문에 서류상 사인만 하면되는일이었다. 린치의 계획은 바이블 조각공원을 만들계획인데 조만간 땅을 도네이션 해줄사람이 나타날것같다고 했다.
린치의 계획이 아버지의 꿈과 조금 다른것이라 해도 여러사람이 아버지의 조각을 감상할수있고. 그 성상들을 보고 사람들마음에 하느님의 섭리를 조금이라도 심어줄수있다면 아버지도 기뻐하실일인것은 분명했다. 아버지는 무신론자였지만 돌아가시기 2주전에 세례를 받고 요셉이라는 세례명을 받으셨다.신부님께 강복을 받으시면서 행복하다고 웃으시던 아버지의 모습은 어쩌면 살아생전 조각을 하시면서 보속을 다하고 가셨기때문이 아닐까 하는생각이 들었다. 나는 차에 시동을 걸고있는 남편의 조각처럼 굳은뒷모습을 보며,그 모습이 어디선가 본듯한 생각이 자꾸 들었다.
남편은 어쩜 아버지의 조각품을 떠나 보내며 아버지를 두번 떠나보내는 심정인지도 모른다. 또한 아버지와 함께 꿈꾸었던 저 꿈의 세월들을 남편은 차마 보낼수가 없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저 꿈의 세월들을….
■수상 소감, 조각가로 살다가신 아버지에게 영광을…
해마다 하얀 벚꽃이 흩날릴 즈음이면 조각을 사랑하다 가신 아버지 생각을 합니다. 미국에 이민 오셔서 무명의 조각가로 20여 년을 살다가신 아버지….
아무도 알아주지않는 일을 당신의 신앙처럼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셨던 아버지.
삶을 철저히 외롭고도 철저히 사랑했던 아버지를 기리며 수상의 기쁨을 아버지와 아버지를 말없이 사랑했던 남편에게 돌립니다.
또한 저의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분들과 중앙일보에 감사드립니다.
■논픽션 심사평…삶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 감동
미주 중앙일보 논픽션 공모에서‘미켈란젤로의 꿈' (박혜자)이 당선작으로 'H 부인의 비밀'(김항선)이 가작으로 뽑혔다. 응모작은 모두 23편이었는데 예심을 거쳐 몇 편의 작품이 물망에 올랐다.
'미켈란젤로의 꿈'은 노 조각가인 시아버지의 집념과 예술혼 그 열정으로 인해 희생 당하는 남편의 모습을 자기 감정을 절제하고 균형잡힌 시각으로 담담히 서술하고 있다. 안정된 문장력 구성력 모두 탁월하고 삶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감동으로 다가온다. 아무도 사 가지 않는 실물 크기의 버려진 조각상이 이민자들의 꿈의 정체를 돌아보게 한다.
'H 부인의 비밀'은 논픽션다운 반전 복선과 암시가 깔린 기법으로 한 개인의 이야기를 민족사적인 의미로 부각시키고 있다. 한국 전쟁으로 잃은 아들 대신 한국인 의사에게 관심을 주었던 노부인의 마음과 희생된 아들을 가진 수많은 부모들의 아픔을 기억하게 한다.
'드들강에 부는 바람'은 이야기 전개에 무리가 없고 담백하고 진솔한 입지전적인 글이다. 늦은 시간 드들강 언덕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어머니의 모습을 배경에 깔고 살아온 날들의 애환을 한 편의 수채화처럼 보여준다. 정확한 어휘 선택에 문제가 있는 것은 한국을 떠나온 지 오래된 이민자들의 공통된 어려움이긴 하지만 극복해야 할 점이다. 마지막 부분에 인생에 대한 겸허한 마음이 표출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세 여인의 인생 파노라마'는 운명을 거슬리고 살아 온 경험과 업적을 바탕으로 한 편의 자서전으로 다시 쓰여지면 좋을 작품이다. 내용이 장황하고 통일감을 잃은 것이 논픽션으로서 결정적인 흠이다.
당선자들에게 축하를 드리고 탈락하신 분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기대해 본다.
심사위원/ 홍승주.김광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