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 사이의 가장 이상적인 나이 차이는 몇 살일까. 나이의 많고 적음이 연애에, 결혼에 걸림돌이 될 수 있을까. 최근 오레곤주에 사는 한 여성의 상담편지를 받고 해 본 생각이다. 스물 여섯 살의 그 여성은 유학을 왔다가 서른 세 살의 미국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결혼까지 생각할 정도로 깊이 사귀고 있는데 문제는 한국의 부모가 이 결혼을 결사반대 한다는데 있다. 물론 남자가 미국인이라는 것이 반대의 첫째 이유였고 남자의 나이가 여자보다 일곱살이나 많은 게 두 번째 이유였다. 불과 일곱 살일 뿐인데. 혹시 그 부모는 첫 번째 반대 이유도, 두 번째의 반대 이유 역시도 남자가 타인종이라는데 있지 않았을까.
내 고종사촌 동생 하나도 이십년 전 결혼할 당시 나이 때문에 갖은 우여곡절을 다 겪었다. 신부 될 사람의 나이가 사촌보다 여섯 살이나 많아서 집안 부모는 물론 조부모까지 나서서 반대를 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연상의 아내가 별로 놀라울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얘기지만 이십년 전, 아내될 사람 나이가 남편보다 많다는 것은, 그것도 한두살도 아니고 자그마치 여섯 살이나 많다는 것은 참으로 경악스럽고도 남세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사촌은 끝까지 꿋꿋하고 담대하게 그 결혼을 밀고 나갔고 마침내 양가부모가 다 참석한 자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 난리를 치르며 한 결혼이어선지 그들 부부는 지금까지 별 탈없이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들 부부를 한국에 갈 때마다 보게 되는데 그들 모습에서 나이 차이를 거의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세월이 가면서 남편이 아내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것 같다.
내 주위엔 스무살 가까이나 나이가 많은 남편과 사는 여성이 있다. 그들 부부를 처음 봤을 때도 나는 그들이 그렇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람들인 줄 몰랐다. 남편은 사십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해맑은 동안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고 아내는 일부러 나이를 밝히지 않으면 그렇게 어린 나이라는 것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성숙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았다. 아내가 남편의 나이랑 비슷해 보이려고 옷이나 머리 스타일, 장신구 한 개에도 엄청 신경을 쓴다는 사실을.
언젠가 이 칼럼에 한 번 언급한 적 있지만 내가 친구처럼 어울리는 사람들은 거의 남자들이고 나보다 나이가 한참이나 많은 사람들이다. 내일모레 칠십을 바라보는 ‘할배들’인 것이다. 이들 할배들과 일주일에 한두번씩 만나며 십년, 이십년의 인연을 이어오고 있지만 그동안 나이에서 오는 이질감이나 거부감을 거의 느껴본 적이 없다. 오히려 그들은 인생의 경험과 연륜을 통해서 쌓은 여유와 너그러움이 있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훨씬 편하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랬다. 그들 할배들이 나의 데이트 상대가 아니고 남편이 아니라서 그렇게 느껴지는 거라고. 한 집에 살면서 일상으로 부딪치게 되면 또 이야기가 달라진다나.
“둘이 차를 타고 가면서 이계숙씨는 김현식의 노래를, 이은미의 노래를 듣고 싶은데 나이 많은 남편이 ‘나그네 설움’이나 ‘울고 넘는 박달재’를 들어야 한다고 우긴다는 가정을 해보란 말이야. 그래도 나이가 결혼생활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냐고.”
글쎄, 과연 그럴까. 어떤 음악을 좋아하느냐는 나이 문제가 아니고 취향 문제가 아닐까. 나 보다 스무살 가까이 나이 많은 J씨의 십팔번은 이문세의 ‘내 마음 다시 여기에’와 노사연의 ‘만남’이다. 반면 아직은 오십대인 H씨는 ‘강원도 아리랑’이나 ‘창부타령’등 민요를 좋아한다. 언젠가 한 번 출근길에 H씨의 차를 얻어 탈 일이 있었는데 희한한 음악이 흘러나와서 혼비백산해야 했다. 나중에야 그게 ‘회심곡’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런 귀기(鬼氣) 어린 음악을 이른 아침부터 태연하게 듣고 있는 그가 다시 보였다.
아직 사십이 안되었는데도 고루하고 봉건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 있는가하면 일흔의 나이에도 젊은이 못지 않게 현대적이고 열린 시각으로 사물을 보는 사람도 있다. 상투적인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나이라는 것은 그저 숫자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사람들을 만나면서 다시금 새록새록 느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