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연 여사. 내 외할머니의 본명이다. 1927년에 출생하신 할머니는 일제 식민지 치하 한국에서 태어나 1943년 오사카로 유학갔다. 그 곳에서 일본식 이름인 하루꼬(春子)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기위해 열여섯살에 시집을 간 외할머니. 콜로라도 공연기간 중 일주일간 휴식이 생긴 나는 외할머니가 계신 LA에 잠시 다녀왔다. 이전에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할머니의 10대 이야기를 들으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오페라 가수로서 내가 가장 많이 공연한 작품이 푸치니의 ‘나비 부인’이다. 일본 나가사키 출신 게이샤의 인생을 담은 이 오페라를 지금까지 100여회에 가까이 공연하면서 참으로 많은 국적의 가수들을 만나 함께 공부해왔다. 최근에 가장 많이 느낀 것은 서양인들에게는 한국과 일본의 문화는 참으로 다른 것이라는 점이다.
일본이 한국보다 서양에 문호를 먼저 개방했었기에 일찌기 유럽인들에게는 생소하고 특별한 것으로 한때 각광을 받았었던 것이다. 아직도 서양에서의 일본 문화는 왠지 우등한것으로 또 어떤 면에서는 동경받는 대상이 되어있는것 같다. 스시, 녹차, 매화, 소니 등등 많은 일본문화가 세계화되어있다.
오페라 한 작품을 올리기 위해서는 모든 가수들과 연출자, 지휘자 모든 스탭들이 시대적 배경, 줄거리, 음악과 가사의 상세한 부분을 공부하고 연구하게 된다. 특히 일본의 한 특정 지역에서 실제로 일어났었던 선명하고 비극적인 줄거리를 담은 ‘나비 부인’은 당연히 동양계 가수들이 대거 캐스팅되곤 한다.
많지는 않지만 일본계 소프라노 중에 나비부인을 소화할만한 목소리나 성량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1순위로 캐스팅 대상이 된다. 한국인인 내가 나비부인을 주로 공연하게 되는 이유도 그러하다. 지금 함께 공연하고 있는 메조 소프라노 미까는 일본 오사카 출신이다. 미국에 살고 있지만 아직도 일본에 반쯤 적을 두고 있으며 일본적 삶의 모습이 아주 많이 남아 있다.
이번에 두번째로 공연을 같이 하게 되었는데 지난 번보다 더 많이 친해졌고 서로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 언젠가 한일간의 사뭇 예민한 문제에 관한 얘기가 나왔었는데 결국 서로 둥글둥글하게 얘기를 마무리하며 끝내게 되었다. 정신대에 관해 슬쩍 물어봤던 나는 미까의 예상치 않은 답변에 서로 어색하고 싶지 않아 멋적게 말꼬리를 내리게 되었었다.
같이 공연하는 다른 서양 가수들에게도 미까는 상당히 흥미로운 친구가 되고 있다. 우리가 지금 공연하고 있는 오페라가 일본 배경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미까에게 정통적인 일본스러움에 관한 질문을 많이 한다. 걸음걸이 하나부터 음식이며 소품이며 기모노 정장 모습까지 제대로 배우려고 하는 사람이 많다.
나는 지금까지 나비부인을 공연하면서 내가 동양인이기에 자연스럽게 익혀지는 연기나 표현이 참 많다고 생각해왔었는데, 일본인인 미까와 함께 공연을 하면서는 어느새 한국과 일본의 차이를 자주 보게 된다. 그럴 때마다 20세기 초, 1904년에 ‘나비 부인’을 초연시킨 이태리 오페라의 거장 푸치니가 한국 배경의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고 작고한 것이 안타깝고 원망스러워진다.
가뜩이나 ‘나비 부인’이 초연되었던 그 해 2월은 한일합방의 시초인 한일의정서가 작성된 때이기도 해서 더욱 괜한 울분이 생기기도 한다. 우리나라도 문호를 일찍 개방했었더라면 한국의 ‘장화홍련’이나 ‘춘향전’이 이탈리아 작곡가에 의해 씌여져서 지금은 전 세계에서 공연이 되고 있었지 않을까.
어제 저녁에는 조연출자가 초대한 저녁식사에 후식으로 내가 찹쌀떡을 만들어 갔다. 처음으로 만들어봤는데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뭐냐고 묻길에 ‘sweet rice cake’이라고 했더니 생소해했는데, 미까가 ‘모찌’라고 하자 다들 ‘아하!’ 했다. 언제부터 모찌가 그렇게 많이 알려졌었는지. 일본 음식은 다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그저 반갑고 고마와했다. 다음 번에는 제대로 된 한국 후식을 선보여 봐야겠다. 수정과나 식혜라면 아마도 큰 인기를 끌지 않을까 싶다. www.yunahlee.com.
# 이윤아의 오페라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