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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농구 조직력 뛰어나…11월 광저우대회 '금' 목표"

Los Angeles

2010.08.24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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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광 한국 남자농구대표팀 LA전훈 단장 인터뷰
확 튀는 외모·원조 오빠부대
시험 떨어져 야구에서 농구로 전향
혼혈이란 놀림 "짱'인 내겐 안 통해


"그렇지 좋았어." "아니지 그게 아냐. 왜 불필요한 동작으로 턴 오버를 범하나."

지난 19일 LA 인근 호손 시에 위치한 핵스LA 실내 농구장에서는 한국 남자농구대표팀과 NBA 출신을 포함한 미국 연합팀의 연습경기가 열리고 있었다. 유재학 감독과 함께 대표팀의 LA 전지훈련을 이끌고 있는 김동광 단장(59)이 관중석에 앉아 유심히 선수들의 플레이를 지켜보며 연신 탄성과 아쉬움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규섭의 외곽 3점포가 연달아 상대팀 림을 가를 때면 김 단장의 몸도 들썩거리며 흥을 냈다. "오늘은 왠일이지 인&아웃 버거를 먹어서 그런가. 지금처럼만 해준다면 11월 광저우 아시안게임 금메달도 문제없을 텐데…." 마침 같이 경기를 관전하던 재미대한농구협회 서광호 회장도 "앞으로 계속 인&아웃만 먹일까"라며 맞장구를 친다. 하지만 잠시 뒤 양동근의 더블 드리블로 공격권이 넘어가자 김 단장은 "허참 해서는 안 되는 건데"라며 입맛을 다셨다.

김동광 단장. 1970년대 한국 농구의 간판으로 파워풀한 플레이와 넘치는 카리스마로 '아시아의 터보엔진'이란 별명을 달고 다녔던 대스타. 한국전쟁시절 미군병사(조지 E. 프렛츠)를 아버지로 태어난 혼혈아로 그의 외모는 누가 보기에도 한 눈에 탁 튀었다.

고려대 시절 태극마크를 단 후로 실업과 프로를 거쳐 프로농구 감독과 대표 팀 지휘봉까지 잡으며 40년 넘게 농구인생을 걸어 온 그다. 지금도 한국프로농구연맹(KBL) 경기이사란 직함으로 농구 발전을 위해 정열을 불태우고 있는 김 단장을 만나 그의 농구인생과 한국 농구 발전을 위한 제언을 들어봤다.

-여전히 탁 튀는 외모시네요.

"아무래도 그렇죠. 제가 혼혈 아닙니까."

-어린 시절엔 놀림도 받았을 법 한데요.

"그렇긴 한데 정작 저 자신은 혼혈이란 것을 별로 느끼지 못하고 살았어요. 초등학교 시절부터 운동을 했고 또 소위 말해 '짱'이었거든요. 어머님이 밖에 나가서 맞고 들어오는 것을 용서하지도 않았어요. 지금 돌아보면 그 만큼 강하게 키우려고 했던 거 같아요."

-어린 시절 아버지가 함께 살지 않는다는 게 힘들지는 않았나요. 형제도 없고….

"함께 살지는 않았지만 어려서부터 아버지와는 연락이 있었어요. 편지나 사진 연락도 있었고. 어려서 그랬는지 특별히 예민하지 않았죠. 또 기계체조니 육상 야구 등 운동을 많이 해서 그런지 함께 운동하는 선후배들이 형제 이상으로 가까웠어요. 그들이 내겐 친형제나 다름없었죠."

-기왕 가족 얘기가 시작됐는데요. 17년 전인가요. 바레인에서 아버지와의 만남도 있었고요. 지금도 가끔 연락을 하는지요.

"아니요. 2000년 삼성 감독으로 있으면서 통합 우승 후 아버지를 한 달간 한국으로 초청해서 모신 적이 있어요. 그 때 이후로는 연락이 끊겼어요. 군 은퇴 후 특별히 연고지를 갖지 않고 트레일러를 이용해 여행을 다닌다는 정도만 알고…."

-아버지가 새 가정을 꾸렸고 이복동생이 있다고 했는데요.

"네. 언젠가 동생의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옆모습이 정말 나랑 똑같더라고요. 정말 신기하데요."

-마음만 먹으면 쉽게 연락을 해 볼 수도 있을 텐데요.

"글쎄요. 아버지를 한 번도 안 본 것 아니고. 아시다시피 이젠 그렇게까지 혈육에 대한 정이 절절하다거나 그런 건 사실 없어요."

-현역시절 농구도 잘했지만 이국적 마스크 때문에 여학생 팬들의 인기를 독차지 했었다고요.

"지금으로 치면 오빠부대의 원조격이었죠. 그런데 당시만 해도 팬클럽이니 하는 그런 게 없을 때고 또 다들 순진했던 것 같아요. 초콜릿이나 주스같은 것 하나 손에 쥐어주고 돌아서는 게 전부였죠."

-왜 하필 농구였을까요. 다른 운동도 많이 했었는데.

"그러게요. 원하는 대로 풀렸으면 아마 야구를 했을 겁니다. 실제로 야구부가 있는 중학교로 진학하려고 1차인 상인천중 시험도 봤어요. 그런데 그만 떨어졌어요. 그래서 2차인 송도중으로 진학한 게 농구와 인연을 맺게 된 거죠. 송도중학엔 야구부가 없었어요."

-어떤 운동이든 지 척척 해냈으니 능력은 타고난 거겠죠.

"아버지를 만났을 때 족보를 전해들었는데 할아버지가 독일계고 할머니는 아일랜드쪽이라고 했어요. 그러고 보니 좀 거칠고 드센 기질을 이어받은 듯 해요. 운동하는 데 딱이죠."

-결국 그렇게 해서 대학 3학년 때 대표선수가 됐고 1982년 은퇴할 때까지 '터보'란 별명으로 아시아 무대에서 맹활약을 했는데요. 기억에 남는 순간들을 꼽는다면.

"대학 4학년 마지막 고연전하고 1978년 첫 남북대결 그리고 1997년 대표팀 코치로 사우디ABC대회에서 27년 만에 우승한 것 등이 기억에 남네요. 2000년 삼성 감독으로 우승을 차지한 것도 있고요."

-대표 선수로 있으면서는 한 번도 아시아대회 우승을 하지 못했다면서요.

"중국 때문이었죠. 운도 정말 없었어요. 만리장성만은 넘을 수가 없었어요. 240cm 180kg의 무태추가 버티고 있으니 속수무책이더라고요. 한 번은 제가 공격을 하면서 있는 힘껏 부딪혀 봤어요. 그런데 내가 나가 떨어지더라고요. 정말 징글징글했죠. 그래서 무태추가 있는 한 내겐 우승도 없다며 대표팀 유니폼을 벗어 버렸어요. 그때가 1982년이죠. 그리고는 저는 곧바로 바레인 감독으로 떠났죠.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해에 무태추도 은퇴를 했고 한국팀은 뉴델리대회에서 우승을 했어요. 허참~."

-그럼 컴백을 시도해 보지 그랬나요.

"한국 실업팀서 30만원 월급받을 때 바레인에서 6배 이상 봉급을 받을 때니 돌아 올 생각은 안들었죠. 그리고 컴백 안하길 잘했죠. 중국이 뉴델리 대회에서 박살난 후 다시 무태추를 컴백시켰거든요."

-남북대회에 대한 기억은요.

"남북이 지금보다 훨씬 적대적이었을 때였죠. 경기장에 들어갈 때부터 선수들끼리도 정말 신경전이 장난이 아니었어요. 북한 여자 선수들이 우리한테 '감자떡'을 날릴 정도였고요. 북한 선수들은 나를 특별히 지목해 '뺑코'라며 놀리기도 했죠. 아마 혼혈에 대한 놀림을 들은 건 그 때가 거의 처음이었을 겁니다. 경기 결과요? 후반 10여분 남기고 북한 선수들이 퇴장하면서 그냥 끝났죠."

-한국 농구가 아시아권에서는 강한편이지만 세계를 무대로 삼지는 못하고 있는데요. 구기 종목 중 야구나 축구는 뛰어난 몇몇 선수들이 그래도 어깨를 견주기도 하는데.

"하승진이나 방성윤 정도가 도전을 해봤고 앞으로 그런 선수들이 점점 많아질 것이라고 생각해요. 요즘 크는 선수들은 체력도 좋고 기술도 나아지고 있으니 언제가는 농구에서도 세계적인 선수가 나올 것이라 믿습니다."

-LA는 물론이고 미주 한인 청소년들도 농구에 관심이 많고 한국팀에서 뛰고 싶어 하기도 하는데요.

"아무래도 체격조건상 NBA진출은 쉽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한국 농구도 이젠 세계적인 수준이라 적어도 대학농구인 NCAA까지는 뛴 경력이 있어야 할 겁니다. 저같은 혼혈도 이젠 한국 프로농구에서 얼마든지 기량만 된다면 길을 터줄려고 하고 있으니 재미농구협회 등을 통해 트라이아웃에 임한다면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겁니다."

■김동광 단장은

김동광 단장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2월 부산에서 미 공군으로 참전한 조지 E. 프렛츠와 당시 미군부대 영내 커피숍 종업원이던 김옥련(96년 작고)씨 사이에서 출생했다. 어머니 김씨가 만삭일 때 프렛츠씨는 일본으로 전출을 갔고 이후 연락이 끊겼다. 6살 때 인천으로 이사하면서 신흥초등학교-송도중고-고려대를 거쳐 실업농구 기업은행에서 활약했다. 바레인에서 3년간 감독을 지낸 후 다시 기업은행 SBS 삼성 KT&G 감독을 역임했고 2007년 KBL 기술위원 2008년 이후 KBL 경기이사로 재임 중이다.

호손 시=김문호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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