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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人] 사업·단체활동 접고 은퇴 4년째…LA상의 강상윤 전 회장

"너무 바쁘게만 살다보니 중요한 걸 많이 놓쳤네요"
브라질·LA서 의류업 성공
경제단체서도 활발한 활동
제2 인생은 돈 아닌 봉사로

"성공 집착하며 들볶는 삶, 결국에 아쉬운 마음 남겨…정말 좋아하는 일 했으면"

원단업체를 운영하며 90년대부터는 한인상공회의소 이사장 3번 회장 2번 한인경제단체협의회 회장 2번 한인회 이사장 등 10여년 넘게 한인사회 일꾼으로 봉사를 겸했다. 4년 전 한인회 이사장을 끝으로 단체 활동과 비즈니스를 정리하고 홀가분한 상태가 되어 '자연인' 강상윤으로 돌아갔다. 한동안 언론에서 얼굴을 보기 힘들었던 그가 중앙일보 문화센터에 나타났다. 최근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했단다. 나이보다 젊어보이는 '동안'은 여전했다.

-단체활동도 비즈니스도 접고 뭐 하고 지내세요?

"욕심을 놓으니까 모든 것이 편합니다. 숨쉴 틈 없이 살았던 것 같습니다. 무엇이 행복인지도 모른 채 말이죠. 요즘은 그동안 소원했던 친구들과 어울리고 여행도 자주 합니다. 아침 등산도 일과입니다."(매일 오전 5시에 일어나 버뱅크에서 지인들과 만나 한두시간 등산을 하는데 이 덕분에 180파운드까지 늘었던 몸무게가 162 파운드까지 줄었단다.)

-옛 친구들도 많이 만나시겠군요.

"그렇죠. 바쁘다는 핑계로 잘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과 만나 회포를 푸는 즐거움이 큽니다. 한국에서 친구가 찾아오면 차를 몰고 한 일주일 무조건 떠납니다. 아무데나 가다가 냇물이라도 있으면 라면도 끓여 먹고 하면서 말이죠. 너무 즐겁더라고요. 이 친구들이 한국에 돌아가 소문을 내는 바람에 잇달아 찾아온 친구들과 무작정 여행을 한 게 한 열번쯤 됩니다. 살면서 고마웠던 사람들도 다시 찾게 되고요."

-나이 들수록 친구가 참 좋죠.

"그럼요. 지나고 보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인간관계인 거 같아요. 좋은 사람과 평생 인연을 갖고 가는 것 그것만한 자산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쁘게 살 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죠. 지금 와서 생각하니 참 중요한 것을 놓치면서 살았구나 싶습니다."

-이젠 편하게 비즈니스 인생을 돌아보실 수 있을 텐데 브라질에선 어땠습니까.

"잘 나가던 직장(대한농산)을 그만두고 브라질행을 택한 건 순전히 '더 큰 물에서 놀아보라'고 자극을 준 부친 때문이었습니다. 72년도에 내가 먼저 브라질에 들어갔는데 막상 동포들의 현실을 보니 막막하더군요. 그냥 포루투갈어나 좀 배워서 돌아가야 겠다는 생각으로 1년을 지냈는데 부친이 집 팔고 가족 모두 브라질로 오신 겁니다. 그 때부터 정신이 번쩍 들어서 유대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의류업에 뛰어 들었고 6개월 단위로 움직이던 당시 주문 관행을 1~2주 만에 해치우는 순발력으로 크게 성공했습니다. 돈 많이 벌었습니다."

-미국에는 어떤 계기로 오신 거죠.

"70년 대 말 LA에 들르니 금리가 15%까지 되는 겁니다. 반면에 브라질에서는 인플레가 진행되면서 민심이 극도로 불안해지고 약탈도 곳곳에서 발생하곤 했어요. 불안했죠. 돈을 차근차근 옮기고 81년도에 다 정리하고 LA로 왔습니다."

-그 때도 의류업을 시작하셨나요.

"그 당시만 해도 LA다운타운의 의류업체들은 유대인 천지였습니다. 한인들은 거의 없었죠. 브라질에서도 유대인 속에서 성공했는데 미국에선들 못하랴 하는 각오로 뛰어들었습니다.(그때 유일했던 한인은행인 외환은행장도 극구 말렸단다.) 하루 현찰 매출이 7만 달러까지 오르기도 했습니다. 좋은 시절이었죠."

-위기는 없었나요.

"왜 없었겠습니까. 시작하자마자 돈을 쓸어담다시피 했지만 곧바로 멕시코 페소화 폭락 사태가 오더군요. 주 고객이던 멕시코 바이어가 딱 끊기는 겁니다. 재산 절반 정도 날렸습니다."

-건축업도 손을 댔다면서요.

"페소 폭락으로 큰 충격을 받으면서 83년에 건축개발회사를 냈습니다. 건축가를 고용해 사장을 세우고 제가 돈을 대는 거였는데 올림픽가에 22유닛 아파트를 지어 성공을 했어요. 그 아파트 개발이 성공하자 의사 투자가들로부터 여러건의 주문이 밀려들었습니다. 여러 이유로 건축 외도는 그걸로 끝냈습니다."

-그 다음부터 원단을 하신 거군요.

"그렇죠. 그런데 2000년 들어서면서 중국을 돌아보고 나니 인터넷을 통한 직거래가 급속하게 퍼지면서 원단 유통업은 설 자리가 없어지겠다는 위기감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4만 스퀘어피트에 꽉 차 있던 원단을 모두 정리했습니다."

-바쁜 사업에서 손을 떼고 나니 어떤가요.

"뭐 대단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나를 들볶으면서 살았나 하는 후회도 많이 들더군요. 돈만 좇아서 여유없이 살아온 지난 삶에 아쉬움도 크고요. 인생 우습게 살았네 하는 생각도 듭디다. 중요한 것들을 너무 제쳐두고 살았구나 하는…."

-인생관 같은 게 달라졌나요.

"젊었을 때는 '성공'만 바라보며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면서 산 것 같습니다. 시야가 무척 좁았던 거죠. 그런데 지금 여유를 갖고 보니 결국 중요한 것은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인간관계고 정이고 사랑이고 보람이고 그런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적당한 수준에서 만족하면서 더 넓게 살 수도 있었는데 말이죠."

-돈을 많이 벌었으니 그런 여유있는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웃으며) 돈요? 나이 들면 돈이 있으나 없으나 비슷한 거 같아요. 우리 부부가 요새 소셜 시큐리티 2500달러 정도 받는데 그거면 사는데 불편이 없어요."

-살면서 가장 힘이 됐던 게 있다면.

"고등학교 때 후배 아버님이 나를 보더니 '상윤 학생 자네는 앞으로 무얼해도 크게 될 걸세'하면서 어깨를 툭툭 쳐 주셨죠. 그런데 그 한마디가 내가 어려울 때 항상 버팀목이 되어주면서 평생 기억에 남는 거예요. 남에게 자신감을 주고 격려하는 게 그렇게 중요하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잠시 봉사했던 나눔선교회 청년들에게도 자신감을 갖도록 얘기 많이 했죠."

-자녀 분들은요?

"위로 두 딸과 막내 아들이 있는데요. 요즘 내가 둘째딸(사이모니)을 보며 많이 느낍니다. 이 녀석이 연봉 20만달러짜리 직장을 그만 두고 미국 펜클럽 멤버로 뽑혀 요즘 작가 수업을 받고 있어요. 난 걱정되지만 저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죠. 밤을 꼬박 새면서도 '아빠 아임 쏘 해피' 하는 이 녀석을 보면서 역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행복하다는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앞으로의 행복 만들기는 뭡니까.

"돈은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은 역시 남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할 때 생기는 것 같습니다. 불우 청소년 등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하며 보람을 찾는 그런 일을 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궁금한 거 뒤늦게 컴퓨터는 왜 배우세요?

"하하하 큰 용기를 냈죠. 그 동안은 다 시키면 됐잖아요. 그런데 이젠 내가 직접 확인하고 싶은 것도 있고 자식들에게 더 이상 의존해서도 안되겠고. 무엇보다 뭔가를 새로 배운다는 게 너무 재밌잖아요 하하하."

〈만난 사람=이원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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