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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애팔래치아 산맥

Chicago

2010.11.15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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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원/편집국장
지난 주말 자동차를 갖고 동부를 다녀왔다. 편도 800마일이 넘는, 운전대를 잡고 있는 시간만 14시간 이상인 거리였다.

시카고와 인디애나 주를 지나 오하이오 주 동쪽에 이르자 풍광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높지는 않지만 분명한 ‘산’들이 나타났다. 몇 년만에 마주하는 산세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렜다.

펜실베니아 주 서쪽에 이르자 애팔래치아 산맥이 눈에 들어왔다. 캐나다에서 시작돼 미국 북동부를 거쳐 앨라배마 주까지 비스듬하게 연결되는 애팔래치아 산맥은 길이가 1,500마일에 이르는 거대한 산줄기다.

난생 처음 직접 목격한 애팔래치아 산맥은 톱날 모양의 높은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이어지는 상상 속의 모습은 아니었다. 평균 높이가 3천 피트라고는 하지만 옆으로 놓인 상자처럼 편평한 형태여서 그다지 높아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애팔래치아 산맥의 진면목은 산중으로 들어가면서 드러났다. 100~300마일에 이른다는 폭은 지리산을 여러 개 포개놓은 것처럼 깊고 넓었다. 눈앞에 보이는 높은 산 언덕을 오르면 또 다른 산들이 나타나기를 계속했다.

21세기 늦가을 어느 날, 애팔래치아 산맥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넘어가면서 19세기 이전까지 서부 개척을 위해 동부 해안가에서 거대한 산들을 넘어 서부로 향하던 개척시대 미국인들을 떠올렸다.

더 나은 삶을 향해 산을 넘던 그들에게는 장밋빛 미래에 대한 부푼 기대보다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과 앞으로 펼쳐질 날들에 대한 걱정이 더 컸을 것이다. 덜컹거리는 마차나 딱딱한 말안장의 불편함조차 느낄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은 이 때문에 결국 산을 넘지 못하고 되돌아가기도 했을 것이다. 또 일부는 자신이 살던 곳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산 중에 터를 잡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수가 미시시피 강을 넘어 서부로 발걸음을 계속 옮겼을 것이다. 이들 중에는 1849년 골드 러시 때 캘리포니아 금광을 향해 떠난 ‘49ers'들도 포함될 것이다.

생김새와 나이는 달라도 그들에게는 ‘꿈’이라는 똑같은 목표가 있었을 것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 도전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은 이들 덕분에 미국은 애팔래치아 산맥의 동쪽 대서양에서 록키 산맥 서쪽의 태평양에 이르는 ‘거대한 오늘’을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뉴욕과 필라델피아를 거쳐 시카고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으면서 3년 전 찾았던 스모키 마운틴을 떠올렸다. 노스캐롤라이나와 테네시 주 등에 걸쳐 소재하는 스모키 마운틴은 인디언 말로 ‘샤코나게(연기처럼 푸른 땅이라는 의미)’로 불리는, 애팔래치아 산맥 중 가장 험준한 곳이다.

이 지역에 살던 인디언 체로키 족은 1838년 금광을 노린 일부 백인들의 욕심 때문에 강제로 쫓겨나게 됐다. 그 해 10월 1만6천여명의 체로키족은 기병대의 감시 속에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 1천 마일 이상 떨어진 오클라호마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이듬 해 3월 오클라호마에 도착했을 때 체로키 족은 혹독한 산중의 겨울 추위와 굶주림, 병마 등으로 인해 전체 인구의 1/4을 잃었다. 이 때문에 당시 체로키 족의 이주는 ‘눈물의 트레일(Trail of Tears)’로 불린다.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가던 개척자들의 발걸음이 도전과 투지였다면 체로키족의 행렬은 비통과 슬픔이었을 것이다. 전자가 오늘 날 세계 최고의 국가 미국을 건설한 바탕이 되었다면 후자는 미국이 남몰래 간직하고 있는 역사의 아픔이라고 할 수 있다.

자동차를 이용, 거대한 애팔래치아 산맥의 동서를 편안하게 넘나들면서 개척자들에 대한 감사와 존경심, 고향을 떠나야 했던 인디언들에 대한 애틋함과 역사의 무상함을 함께 느꼈다. 또 미시간 주에 살면서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곤 했다는 소설가 이윤기 선생의 부재(不在)는 그의 글에 대한 갈증을 불러왔다.

21세기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애팔래치아 산맥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당분간 화두처럼 붙들어 볼까 한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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