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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人] 이태석 신부 다큐 '울지마 톤즈' 제작 감독 구수환 KBS PD

"울지 않는 딩카족이 목놓아 운 이유를 알고 싶었다"

악조건 속에서 제작 강행…감동이 있는 다큐 가능성, 한인사회 방영 화제 만발
"사람이 사람에게 꽃이 된 아름답고 감동적인 얘기…종교 초월한 교훈 됐으면"


동티모르, 팔레스타인, 체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등. 방탄복과 방탄모에 목숨을 의지한 채 웬만한 전세계 분쟁지역은 다 가봤다. 현장을 직접 봐야 정확한 팩트를 전달할 수 있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25년 동안 시사프로그램 프로듀서로 한 우물을 팠다. 그러던 중 지난 1월 아프리카 ‘수단의 슈바이처’로 불리던 이태석 신부의 선종 소식을 접했다.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사람. 그러나 그의 죽음은 다큐멘터리 PD의 본능을 자극했다. 왜 의사로서의 인생을 포기하고 성직자가 됐는지, 왜 그는 하필 멀고 먼 아프리카를 선택했는지 궁금했다. 그의 발자취를 따라 가기 위해 아프리카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달 초 LA한인타운 내 CGV에서 열린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마 톤즈’의 시사회. 가톨릭 신부가 된 의사, 이태석 신부(1962~2010.1.14)의 삶과 죽음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의 미주 상영은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됐다. 이 날 첫 시사회 현장을 찾은 관객 앞에 낯익은 얼굴의 중년 남성이 나와 마이크를 잡았다. 이내 관객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온다.

“어디서 봤지?” “왜 있잖아. 그 시사고발 프로그램 진행자.” 마이크를 통해 “울지마 톤즈를 제작한 KBS 구수환 프로듀서 입니다”라는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관객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이어 “이 영화는 인간이 인간에게 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한 남자의 이야기”라며 “종교를 초월해 이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고 제작 의도를 전했다.

짧은 인사말과 감사의 인사를 전한 그는 영화가 상영되는 90분 내내 상영관 한켠을 지키고 서서 관객들의 반응을 살피고 호흡을 함께 했다. 영화가 끝난 뒤에는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는 관객들의 표정 하나하나까지 카메라에 담았다. 영화 감독으로서 미국을 찾은 KBS 구수환 프로듀서(52)를 만났다.

- 영화 ‘울지마 톤즈’가 한인사회에서 화제다. 간단히 소개해달라.

“울지마 톤즈는 이태석 신부의 휴먼 스토리가 아니다. 가톨릭 신부의 이야기지만 종교 영화도 아니다. 객관적인 관점에서 허구성 없이 날것 그대로의 정확한 사실만을 카메라에 담아 전달하는 시사 다큐멘터리 영화다.”

- 방송용 다큐멘터리가 영화로 탄생했는데.

“사실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 제의를 받았을 때 많이 망설였다. 수단의 슈바이처가 공중파를 탔을때 천안함 사태가 터져 시청율이 안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봐주길 기대했는데 아쉬웠다. 그 아쉬움을 영화를 만들며 달랬다. 하지만 180분 분량을 절반인 90분으로 줄여야 해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

- 제목이 왜 울지마 톤즈인가.

“이태석 신부의 관점에서 영화를 보고 생각해봤다. 톤즈는 내전으로 인해 남과 북으로 나뉜 수단 남부 지역의 작은 마을로 이태석 신부가 혼신을 기울여 봉사 활동을 한 곳이다. 톤즈 지역에는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딩카족이 산다. 딩카족은 울지 않는다. 수단 원주민 가운데 용맹함의 상징인 딩카족에게 눈물은 수치이다. 총상 등 아무리 고통스러운 부상을 입어도, 가족이 세상을 떠나도 울지않는 딩카족이 이태석 신부의 죽음 소식을 접하고 목놓아 울었다. 그 눈물은 아버지를 잃은 자식의 진심어린 눈물이었다. 그 지역 신부들은 그들의 눈물이 기적이라고 할 정도였으니. 이태석 신부라면 울고 있는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했을까 고민했다. 비록 당신은 떠났지만 그들의 울음을 멈추게 해 줄 또 다른 사람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제목을 선택한 것이다.”

- 고 이태석 신부와 인연은.

“전혀 없다. 이태석 신부를 단 한 번이라도 만났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했다. 직접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톤즈에 직접 가고 난 뒤 더욱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태석 신부는 의사였다. 의술로 많은 이들을 도울 수 있는데도 성직자가 됐다. 한국에도 가난한 사람이 많은데 아프리카까지 간 이유도 궁금했다. 하지만 톤즈에서 이태석 신부가 생전 얘기했던 ‘삶의 아름다운 향기’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됐다.”

- 수단에서의 촬영은 언제 이뤄졌나

“이태석 신부가 세상을 떠난 직후인 지난 2월 21일 아프리카 케냐로 갔다. 케냐에서 차량으로 수단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톤즈로 향하는 길목이 부족간 충돌로 인해 차단됐다. 회사에서는 촬영을 취소하고 돌아오라고 했지만 수소문 끝에 1박 2일을 돌아 다른 루트를 통해 톤즈에 도착할 수 있었다. 9일 동안의 일정이었다. 수단은 지난 2005년 평화협정에 따라 내전이 끝났지만 여전히 치안이 불안한 상황이다. 군인들에게 잡혀 카메라를 빼앗기는 등 아찔한 위기도 있었지만 현지 신부님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촬영을 끝낼 수 있었다.”

- 안전문제 외에도 힘들었던 점이 많았을텐데.

“날씨였다. 한낮 기온이 섭씨 50도를 넘나드는 살인적인 더위와의 싸움이었다. 밤에도 섭씨 30도가 넘는 열대야가 지속돼 2시간 넘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물을 틀어도 뜨겁고(웃음). 음식도 문제였다. 한국에서 공수해간 음식은 대부분 주민들에게 나눠줬기 때문이다. 그들은 쫄리(이태석 신부의 영어이름인 존 리를 그들은 쫄리라고 부른다) 신부와 같은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도 우리를 살갑게 대했다. 문득 이태석 신부는 이런 곳에서 7년을 지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고 나니 부끄러워서 잠자리 투정도 못하겠더라.”

- 아프리카 촬영 중 울었나.

“톤즈는 이태석 신부에 대한 그리움과 그를 떠나보낸 슬픔으로 가득했다. 이태석 신부의 장례식 동영상을 보여주자 그 곳 사람들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우는 아이를 직접 촬영하는데 너무 서럽게 울어 카메라를 놓고 그 아이를 끌어안고 한참 울었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도, 한국에서 찍어 온 영상을 본 모든 사람들이 울었다. 영화에 나오지는 않지만 톤즈에서 이태석 신부의 유품을 가져와 어머니에게 전달했다. 당시에도 모든 스태프가 거의 다 울었다.”

- 고발 프로그램 진행자에서 감동을 주는 감독이 됐다.

“울지마 톤즈는 절대 슬픈 영화가 아니다. 긍정과 감동을 주는 밝은 영화다. 하지만 시사 다큐다. 시사는 강하다. 25년간 시사프로그램을 하면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가진 사람들의 배려를 외쳤다. 어떤 실상을 고발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 다큐멘터리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울지마 톤즈를 통해 생각이 바뀌었다. 시사임에도 불구하고 감동을 주면서 우리 스스로 느끼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됐다. 방송국 사람들이 구수환이 저런 것도 만드냐고 하더라. 사람들이 이 영화를 통해 스스로 삶에 대한 반성과 긍정의 힘, 베푸는 나눔의 정신을 느낀다고 한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 제작 의도가 정확히 전달된 것 같아 기분 좋다.”

- 앞으로의 계획은

“앞으로는 사람들에게 감동과 사랑을 전달할 수 있는 아이템을 개발해 나갈 것이다. 삶에 대해 진심을 다할 수 있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사례를 발굴해 실천하는 사회를 만들어가는데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 싶다.”

곽재민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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