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과 흑인의 피를 동시에 물려받은 혼혈인들의 자기 정체성 인식은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 알게 모르게 인종 차별이 존재하는 미국 사회에서 흑백 혼혈인들은 자신을 백인 쪽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적지 않았다는 게 지금까지의 통념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 같은 경향성에 뚜렷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계간 '사회심리학회지' 12월호에 실린 연구 결과에 따르면 흑백 혼혈인 가운데 스스로를 흑인으로 규정하는 사람들이 최근 수년 사이에 크게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버몬트 대학 사회학과의 니키 카나 교수팀은 이 학회지 최근호에 기고한 논문에서 흑백 혼혈인을 상대로 설문 조사 결과 과반수가 넘는 응답자들이 스스로를 흑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흑백 혼혈의 경우 외모가 백인과 더 닮았더라도 흑인적 요소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흑인으로 인식하는 게 미국 사회의 일반적인 타자적 시선이다. 이런 환경에서 흑백 혼혈인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타자적 시선과 마찬가지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큰 변화라는 게 카나 교수팀의 지적이다.
카나 교수는 "응답자의 절대 다수는 자신을 백인도 흑인도 아닌 혼혈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한층 더 깊이 파고들어가면 백인보다는 흑인 쪽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가까운 친구들 사이에서나 친지들 사이에서 스스로를 '흑인적'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뚜렷했다는 것이다.
즉 적잖은 혼혈인들이 친구들과 대화 등에서 주로 백인들의 단점을 지적하는 등의 성향을 보였다는 설명이다.
연구팀은 혼혈인들이 스스로를 흑인으로 규정하는 또 다른 이유로 민권운동 등의 영향으로 흑인들에 대한 사회적 혜택이 더 커진 점을 꼽기도 했다.
예컨대 취직이나 대학교 진학 등에서 이점을 누릴 수 있어 스스로를 흑인으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카나 교수는 "오늘날 미국 사회는 과거에 비해 흑인들을 훨씬 덜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며 "많은 혼혈인들이 흑인으로서 자유롭게 자부심을 나타내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