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人] 내년 3월 재선의지 다지는 세리토스 조재길 시장
"출마하면서 영어공부 하는 사람 첨 봤다며 웃더군요"
도미 후 부동산으로 백만장자 진심 통하며 시정에도 탄력
반체제 신문 만들다 역경 겪어 마라톤 완주로 새 인생 도전
오랜만에 만난 조재길 세리토스 시장은 젊어져 있었다. '소명'이라는 제목의 자서전도 내고 66세의 나이에 LA마라톤 완주도 했다. 한국에서 사범학교와 사범대학을 나왔지만 유신을 찬양해야했던 사회 선생님의 길을 버리고 이민와 미국 주류 정치인이 됐다. 부동산으로 80년대 백만장자가 됐다가 광주민주화운동 후 민주화운동 관련 신문을 창간했다가 파산 직전까지도 가기도 했다. 내년 3월 재선을 앞두고 있다.
녹록치 않은 그의 인생을 들어봤다.
-'나는 영어를 잘 못해'라고 자주 말씀하시는데 의원들 상대로 설득하고 연설까지 해야 하는 시장이 됐습니다. 어디 믿는 구석이라도 있습니까?
"(웃음) 제가 시의원에 나가야겠다고 말하는 순간 아이들 셋(광서37.준석35.지아34)이 결사 반대 했습니다. 이유는 똑같았어요. '아빠 영어 때문에 어떻게 하려고?'였어요. 첫 선거가 2003년 이었는데 2001년인가요 캠페인과 동시에 영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믿는 구석은…언어도 중요하지만 진심이 중요한 듯합니다. 진심으로 대하고 진심으로 열심히 하려니깐 다른 의원들이나 시민들도 믿어주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정치는 협상'이라 할 정도로 서로 소통하는 게 중요한데.
"지금도 영어 울렁증이 있어요. 정말 귀 기울여도 70%~80%밖에 못 알아듣는데… 세리토스 시의회 회의 장면은 TV로 생중계되는데 토론도 있고 진행 발언도 있고 유권자들이 그걸 다 보고 있습니다. 저희같은 1세는 발음이 제일 문젠데 토론도 연습하고 연설할 건 전날 밤에 연습을 철저히 하고 갑니다. 2002년에 첫 선거 준비할 때 선거 코디네이터(샌드라 곤잘레스)가 저 한테 '정말 크레이지다. 선거시작하면서 영어 공부하는 출마자는 처음본다'고 웃었어요. 지금은 9년이나 됐으니 그때보다 훨씬 낫습니다.(웃음)"
-가장 큰 장벽(언어)를 두고도 출마하겠다고 결심한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2000년으로 기억되는데 세리토스 시의회 TV를 보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한 시의원의 발언 중에 '한국 커뮤니티가 세리토스 최다 인구로서…' 이런 말이 들려요. 실제 확인해보니 최다인구였습니다. '아이고 한국사람들 뭐하냐'는 생각이 들었는데 갑자기 '그럼 너는 뭐하냐'는 말이 뒤통수를 퍽 때리는 겁니다. 그리고 며칠 뒤에 LA타임스에 90년대는 히스패닉 정치력이 커졌고 2010년까지는 아시안의 정치력 특히 중국 정치력이 굉장해질 것이라는 기사가 났습니다. 분석이 아주 치밀했는데 그 이유가 93년에 생긴 '재미중국인권익신장협회'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한인 정치력 신장위원회도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는 생각을 했습니다."
- 그런 생각이 들고 바로 2003년에 출마하신 것 같습니다.
"처음 출마는 제 당선을 위한 캠페인이라기 보다는 세리토스 한인 유권자 등록 캠페인이었다고 봐야죠(웃음). 당선 안될 거라 생각했지만 한인 커뮤니티만 상대로 유권자 등록 캠페인 열심히 해서 900명이 더 등록했습니다."
-2005년에 두번째 출마할 때는 한인후보가 둘이었지 않습니까?
"사실 두번째 선거 때는 아들이 출마할 계획이었습니다. 한인 유권자 등록 캠페인을 벌였으니 다음 목표는 타커뮤니티인데 제가 영어에 자신이 없었어요. 누군가는 해야 하는데 한인 후보는 없고 가족회의 결과 젊고 활기찬 아들이 나가기로 했죠. 그런데 다른 한인 후보 한명이 더 나온다는 소문이 돈 겁니다. 만나서 단일화를 얘기하려 했는데 못 만났어요. 그런데 일부에서 저를 낙선시키기 위해 한인후보를 낸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제가 80년 광주민주화 운동 직후에 코리안스트리트저널이라는 주간지를 냈는데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신문이었습니다. 그걸로 색깔 시비를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이건 내가 해결해야겠다 싶어서 다시 출마했습니다. 아쉽지만 한인후보 둘다 떨어졌습니다."
-이야기를 뒤로 좀 가보겠습니다. 부동산으로 많이 벌고 광주민주화 후에 신문업으로 직업을 바꿨는데 그 정도로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었나요?
"제가 서울대 사범대 사회교육과를 입학할 때가 61년이었습니다. 박정희 정권과 정면으로 함께 갔죠. 공군장교를 마치고 사회 선생님이 되었을 때 저는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사회 선생님이어야 했는데 유신체제의 우월성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변해갔습니다. 사범학교(경북안동사범학교)나오고 사범대를 나와서 직업이 선생님으로 정해졌는데 유신을 가르치는 건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유학을 준비했죠. 미국으로 와서 청소부에 개스 스테이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LA카운티 전산실로 들어갔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까지 했는데 다시 광주민주화운동이 터지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거죠. 분노했습니다. 미국에서 민주화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거죠."
-인생을 바꿔준 잊지 못할 사람도 있습니까?
"부모님이 일본 큐수에 징용간 사이에 제가 태어났습니다. 두살 때 고향(충북 단양)으로 가서 초.중학교를 다녔고 안동사범학교를 다녔는데 인생이 '선생님'으로 정해져 너무 뻔한 겁니다. 말썽을 피우기 시작했죠. 문제아로 흘러갔습니다. 그때 교무주임 선생님(나동성)이 부르시더니 '목표를 주겠다. 대학 갈 공부를 하라'고 했습니다. 당시는 뭐 대학갈 형편이 안됐죠. 빨리 사범학교 졸업해서 선생님 돼서 돈 벌고 집안 살림에 보태고 해야 할 땐데… 그냥 공부했습니다. 그 선생님이 안 계셨더라면 아마 지금 제가 없지 싶습니다."
-남모를 고민도 있을것 같은데?
"2008년에 아주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시의원 되고 1년 지나서 '열심히 한다. 잘한다' 이런 소리를 많이 듣게 됩니다. 세리토스 시의회가 한달에 두번 열리는데 저는 거의 풀타임으로 나가서 일을 하니 그렇게 비친 모양입니다. 그런데도 언어 문제는 본격적으로 스트레스를 주는 겁니다. '내 나이 60대 중반에 이런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나. 곧 70살인데 이제 은퇴해야 되는 거 아닌가'하면서 심각하게 시의원 사퇴까지도 고민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아버님이 돌아가셨어요. 아버님은 저를 사범학교 다닐때 결혼시키려고 했습니다. 이유는 '우리집안 남자들 환갑을 못넘긴다. 나는 손자 보고 죽어야겠다'였습니다.
그런데 93세에 돌아가셨어요. 한국에서 장례 치르고 오는 길에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집안 오래 사네. 나는 100살까지 살 수도 있겠구나' 그러면 70이면…10년은 넘게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미국에 돌아와서 마라톤을 시작했습니다. 여기저기 하프마라톤 완주하고 올해 LA국제 마라톤 풀 코스를 완주했습니다. 아버님이 저에게 다시 건강과 용기를 주신거죠. 2008년같은 고민은 지금은 없습니다. 다만 한인 정치력이 커져서 중국커뮤니티가 부러워 할 정도가 됐으면 좋겠는데… 그게 참 쉽지 않네요."
-좀 엉뚱한 질문입니다만 자신을 맛으로 비유한다면 뭘까요?
"구수한 뚝배기 맛이 아닐까 합니다. 제가 주류에서 정치를 하든 사업을 하든 한국인이고 한국의 맛입니다. 앞으로도 한국 뚝배기 맛 정치를 하겠습니다."
글= 천문권기자 [email protected] 사진= 박요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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