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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人] 김영옥 대령 업적 선양 사회운동 언론인 한우성씨

"인사 받는다고 착각하는 당나귀 되진 않을 터"

한국전 양민학살 특집 주목        옆길인 사회 운동가에서
비영어권 첫 퓰리처상 후보        필드 언론인으로 다시 돌아가
김대령 500번 만나 전기 집필       한인사회 위상 신장에 기여하고파


내년부터 제 2차세계대전과 6.25전쟁의 영웅 고 김영옥 대령이 한국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된다. 미주 한인으로는 최초다. 지난 9월에는 UC리버사이드(UCR)에 미국 내에서 처음으로 한인 이름을 딴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가 문을 열었으며 지난해 LA한인타운엔 한인 이름을 교명으로 한 김영옥 중학교가 탄생했다.

모두 한인 이민 역사상 처음이라는 이정표를 세운 커뮤니티의 자랑이자 쾌거였다. 이러한 결실의 중심에는 프리랜서 언론인 한우성(54)씨가 있었다.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의 저자이자 숨은 사회 운동가인 그는 "모든 일이 벗과 동지들이 있어 가능했을 뿐"이라며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했다. 수 차례 설득끝에 한씨를 지난 28일과 29일 양일간에 걸쳐 만났다.

-한우성 자신을 좀 소개해달라.

"나는 프리랜서 언론인이다. 소속없이 활동하는 미디어 자체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다. 프리랜서 언론인에게 자유의 콘셉트는 다르다. 미디어 조직으로부터의 자유는 콘텐트에 따라 온라인과 오프라인 잡지나 방송매체 등 모든 미디어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유로운만큼 금전적인 어려움은 감수해야 한다(웃음)."

-어떻게 언론인의 길을 걷게 됐나.

"지난 1987년 가족과 함께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 대학(연세대)때 부전공이었던 심리학 공부를 더 하고 싶어 가족을 따라 미국행을 택했지만 생활 형편이 넉넉치 않았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주류 통번역 회사에 입사했지만 문화나 인종차별 등 정서가 잘 맞지 않아 퇴사했다. 이 후 우연히 한인 언론사에 입사하게 됐다. 미국에서 한국어로 기사를 쓰면서 자연스럽게 국제 관계나 한인 이민 역사 등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러던 중 6.25전쟁 당시 한국 군경 양민학살 때 아버지를 잃은 분을 만나게 됐다. 당시 이 분은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는 데 모든 것을 걸었다. 진심이 느껴졌다. 기자는 타인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느껴야 할 수 있는 직업이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혼신을 다해 취재했다. 그 결과 한국 군경의 양민학살을 다룬 30여회의 시리즈 기사가 나갔고 AP와 AFP 로이터가 이 기사를 전세계에 알렸다. 보도 후 한국에서 진상규명 위원회가 만들어지고 한인 커뮤니티에서도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등 큰 파장이 일었다. 기자로서 최고의 기쁨이었다."

-퓰리처상 후보에도 올랐다.

"양민학살 기사로 한국기자상 특별상 AP통신기자상 미국 소수계 기자상을 받았고 미주 비영어권 신문 최초로 퓰리처상 후보까지 올랐다. 한인 최초 수상자는 현재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의 서울 특파원인 최상훈 기자로 2000년 노근리 사건 보도로 퓰리처 상을 받았다."

-고 김영옥 대령과의 인연은.

"김영옥 대령은 내가 순수 저널리스트(언론인)에서 액티비스트(사회운동가)로 가는 계기를 만들어 준 인물이다. 그는 최고의 멘토이자 스승이었다. 한인 언론에서 기자 생활을 하면서 주류 사회에서 한인 커뮤니티의 위상을 강화할 수 있는 답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당시 조건은 미국 사회에 대한 공헌도 한인 커뮤니티와 주류 사회의 가교 역할이 가능한 사람 한국과 동포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 한일 관계 개선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로 제한했다. 하나씩 이름을 지워나가다 보니 김영옥 대령만 남더라. 이 후 1997년 2월 무작정 김 대령을 찾아가서 '당신을 인터뷰하고 책을 쓰고 싶다'고 했다. 물론 처음에는 거절 당했으나 나중에 허락을 얻었다. 김 대령 생전에 500여 회에 걸쳐 인터뷰를 했다. 가까이서 본 그는 진정한 선구자였다. 그 분이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줬다는 자체에 감사한다. 김 대령의 일대기를 책으로 쓸 기회가 주어진 뒤로 기자가 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더 들었다."

-책을 쓰는데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들었다.

"1999년 일제 강점기 시기 강제 징용에 대한 대일 소송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진행됐다. 집단 소송이었지만 질 경우 여러 사람이 피해자가 되고 역사 왜곡까지 되게 생겼더라. 당시 홀로코스트 소송이 합의되던 시기라 분위기가 일제 강점기까지 번졌다. 결국 직접 나서 변호인단을 조직하고 강제 징용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까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했다. 하지만 진상규명을 할 수 있는 자료가 하나도 없어 싸울 수 없었다.

연구팀을 만드는 것이 급선무였는데 자금이 없었다. 한국 최초의 여성 대사를 지낸 이인호 당시 국제 교류 재단 이사장에게 사정을 밝히고 25만 달러를 받아 연구팀에게 넘겨줬다. 이 무렵 김영옥 대령을 찾아가 책이 늦어질 거 같다고 양해를 구했더니 '내 책보다 소송에 최선을 다해 싸우라'며 '전쟁은 이기는 전쟁만 있는 게 아니다. 질 것이 뻔한 전쟁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응원해주셨다. 하지만 결국 2006년까지 계속된 소송에서 졌다. 많은 것이 부족했고 체계가 잡혀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송을 거치면서 수 많은 벗과 동지를 만났고 이 소송은 재미동포연구소의 설립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

-한국에서도 김영옥 대령이 알려지며 유명세를 타고 있는데.

"국방대학과 육군본부 기업 대학 등에서 강연 제의가 쏟아졌다. 100여차례 정도 강연에 나섰고 김 대령의 이야기는 CJ미디어를 통해 다큐멘터리로 제작될 예정이다. 하지만 늘 신상을 업고가는 당나귀의 이솝우화를 되새긴다. 당나귀가 새로운 신전에 모실 조각상을 옮기고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신상을 보고 멈춰 절을 했다. 당나귀는 자신에게 사람들이 인사하는 줄로 착각하고 우쭐해져 걸음을 멈춘다는 내용이다. 이런 당나귀가 되지는 않겠다고 수백번도 더 다짐했다."

-2010년 많은 것을 이뤘다. 신년 목표는.

"오는 2011년 1월부터 국방일보에 김영옥 대령의 스토리가 6개월 동안 연재된다. 60만이 넘는 군장병이 김영옥 대령의 리더십을 배워나가는 계기인 동시에 미주 한인 커뮤니티의 자랑이 될 것이다. 또한 영문판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의 작업이 진행중이다. 주류 사회에 김 대령의 이야기를 알리기 위해서다. 이는 궁극적으로 김영옥 대령이 미국 정부로부터 최고 무공 훈장을 받을 수 있게하기 위한 캠페인의 일환이기도 하다.

미국인들은 미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얼마나 피를 흘렸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 때 무공훈장이 가장 큰 척도가 된다. 이는 미국내에서 정치력과 직결되는 부분이다. 한인 커뮤니티는 분명 미국의 발전에 기여하고 김 대령같은 분이 피를 흘렸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모르고 있다. 한인사회가 일치 단결해서 일관된 목소리를 내야 김 대령이 미국 최고 무공훈장을 받고 이는 한인 커뮤니티의 정치력 신장으로 이어질 것이다."

-앞으로 목표는.

"사회 운동가에서 순수 저널리스트로 돌아가는 것이다. 물론 둘다 버릴수 없다. 필드 언론인으로 남고 싶은 희망도 있다. 언론인으로서 한인들의 정체성을 키워 주류 사회에서 위상이 강화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미래가 어떤 시대로 전개되든 한인 커뮤니티와 한국의 발전에 조금이라도 기여 하고 싶다."

곽재민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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