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늦깎이 포수 유승안

Washington DC

2011.01.20 14:01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기사 공유
경찰청 유승안 감독은 실력에 비해 늦게 빛을 본 선수다. 그는 야구 명문 경동고를 졸업했다. 경동고는 올드 야구팬들에게는 60년 당시 최고의 명문팀으로 기억되는 학교다.

‘무패의 전관왕’ 신화의 주인공들인 한국 제 1호 일본 프로야구 선수인 백인천 선수와 ‘원자탄 투수’라고 불리며 그와 배터리를 이루었던 이재환 선수, 한국 최초로 초구 홈런을 친 김충남 전 연세대 감독, 드롭 커브(Drop Curve)의 대가라 불리면서 65년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던 김설권 투수, 당시로서는 드물었던 왼손잡이 장타자 이영기 1루수 등 60년대 한국 고교야구를 주름잡던 선배들의 대를 이은 선수가 바로 유승안 선수였다.

그는 팀이 전국 4강에 들지 못하는 바람에 대학에 스카우트 되지 못하고 한일은행에 입단하게 된다. 그 당시 한일은행은 국가대표팀이라고 할 정도로 대단한 선수들이 즐비했었다.

특히 유승안의 포지션인 포수자리를 국가대표이자 4번 타자인 우용득 선수가 터를 잡고 있던 터라 유승안에게는 출장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78년부터 전성기를 맞아 79,80년 3년 연속 홈런왕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실력을 인정받게 된다. 이후 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연고지인 MBC 청룡 유니폼을 입고 프로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이 때 MBC 청룡은 그의 하늘같은 선배인 백인천 감독과 이재환 코치가 맡게 된다. 이들은 새까만 후배인 유승안에게 많은 기대를 걸게 된다.

그러나 개막전에서 백인천 감독의 기다리라는 사인을 무시하고 헛스윙으로 물러나 게임에 지게 되자 두 사람의 사이는 껄끄럽게 된다. 그 후로 찬밥 신세가 되다가 84년 해태 타이거스로 트레이드 된다.

해태에서도 크게 활약을 못하다가 빙그레 이글스가 창단되면서 다시 빙그레로 트레이드 되고 출장 기회가 많아지면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87년과 88년에는 김상국과 마스크를 돌려 써가면서 지명타자로 활약하게 된다.

이런 꾸준한 활약에 힘입어 89년 지명타자로 프로야구 진출 후 첫 번째 골든 글러브를 품게 되고 이듬해에는 포수 부문에서 연속해서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게 된다. 사실 유승안은 수비가 약해서 출장 기회가 많이 주어지질 않았다.

그러한 그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오는데 해태 시절 재일동포 김무종 선수에게 수비에 대한 것을 많이 배우게 된다. 이것이 빙그레에서 포수로 활약하는데 많은 보탬이 됐다.
오랜 백업포수 생활과 코칭 스텝과의 불화로 인해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발휘를 못하게 되면서 그의 불같은 성격도 많이 누그러들게 된다. 이때부터 선수 생활의 안정을 찾으면서 좋은 성적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의 불같은 성격은 동네 유명한 불량배들도 한 방에 제압할 정도로 대단했다. 그런 그도 여자에게는 순정파였다. 고교 시절 만난 첫 사랑인 유명 탤런트 이금복 씨와 결혼을 했다.

백혈병으로 부인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부인을 무척 사랑하고 아꼈던 사람이기도 했다. 부인 이금복 씨와 사이에서 난 두 아들 역시 아버지와 같이 야구 선수의 길을 걷고 있다.

큰 아들이 바로 한화에서 투수로 활약하는 유원상 선수이고 둘째 유민상은 현재 연세대에서 선수로 뛰고 있다.

비록 늦게 빛을 보았지만 선수로써 그리고 한화 감독과 현 경찰청 감독으로서 한국 야구를 이끌어 가고 있는 유승안 선수를 추억해 보았다.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