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이민 다큐멘터리-3] 노예와 같은 농장생활, 채찍세례 받으며 새벽부터 밤까지 중노동 시달려
하루 10~12시간씩 일해 한달 18달러 벌어
못살게 구는 백인 십장 끌어내 두들겨주기도
“한국에서 호미자루 한번 안 들어본 분들인데 여기와서 새벽에 일어나서 하루종일… 밤 6시, 7시까지 일을 해야하니까 이거 참 기가 막혀서 그 사람들이 밤이면 아주 울고 지냈다고 그래요. 그런 얘기를 제가 많이 들었습니다. 너무도 손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고, 또 기가 막히고 그래서 울고, 울고 세월을 보냈노라고 그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LA에는 지금 15만 여명의 한국사람들이 살고 있다(1977년 당시의 통계). 김치는 물론 고추장이나 된장, 간장까지도 어디서든지 구입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 음식점에서는 해장국까지 만들어서 팔고 있다. 영어를 한마디하지 않고도 살아 갈 수 있다. 서울거리처럼 간판도 한글로 돼있다.
조금은 천하다고 생각되는 경우가 없진 않지만 직장도 쉽게 가질 수 있다. 몇 년만 고생하면 집도 살 수 있고 자가용차도 몇 대씩 가질 수가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서쪽 하늘을 쳐다보며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이웃을 마중하고 나서도 그들은 운다. 비행기만 봐도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들이 있다. 고생을 하는 사람일수록 더 눈물을 흘린다.
내가 자랐던 버드나무 있는 우리 집, 다정했던 친구들 그리고 사랑하는 부모 형제들, 아무리 살기 편해도 그만은 못하다.
하물며 1백 여년 전 어느 누구도 와 본 일이 없는 하와이 섬에 도착해서 노예와 같은 대우를 받았던 초기이민들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살았는지… 족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집도 없지요. 그저 닭장 모양으로… 거기는 일기가 좋으니까 춥지 않아서 그저 아무렇게나 나무 밑에서 살고 그랬지요.”
“마방간처럼 큰 건물을 칸을 막아 방을 만들었는데 부부간인 경우는 방 한 개를 쓰게 했고 혼자 사는 사람들은 여럿이 함께 기거했습니다. 그저 짐승과 같이 대우했다고해요”
닭장 같다는 이 숙소는 나무로 만들어진 군대 막사와 비슷한 건물이다. 가족이 있는 경우는 1가구에 방 한개, 독신들은 한 방에 5-6명씩 수용됐다. 그리고는 마치 군대 생활 같은 농장 일이 시작된 것이다.
막사에 5-6명씩 수용, 노예와 같은 생활
전 하와이 이민 봉사소 조태룡씨는 아예 ‘노동 이민’이라고 주장했다.
“노동 이민이죠. 파인애플과 사탕 수수밭에 와가지고 사탕수수밭 부근에 그야말로 꼭 '하꼬방'입니다. 그건 뭐 틀림없이 '하꼬방'이에요. 그런 곳에 집단 수용된 것이지요. 한 '하꼬방'에다가 몇 명씩 수용을 해가지고, 그리고는 군대생활과 똑같이 몇 시에서 몇 시까지 일하고…”
하와이 이민들이 하루에 몇 시간씩 일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기억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미 죽었고 얘기하는 사람마다 각각 다르다.
그러나 대체로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아침식사를 하고 일터에 나갈 준비를 한 뒤에 농장에 6시에 도착해서 그때부터 점심시간 30분을 제외하고 10시간에서 12시간 정도 일한 것으로 여겨진다.
1세 동포들의 얘기를 들어본다.“하여간에 아침에 일찍 일어나 가지고 일꾼들이 일나가는 길은 철로를 타고 가거나 구루마를 타고 가는데 일터에 따라서 다릅니다. 내 생각에 6점(시)에 일어 나가지고 10시간 일을 했던 것 같아요.” “아침 4시에 일어나서 밥해먹고 6시가 되면 밭에서 일하고 저녁 6시면 집에 들어와서 집에서 저녁 해먹고, 빨래하고 그랬어요. 퍽 어렵게 살았어요”
김원용은 <재미한인 50년사> 에서 하와이이민은 파인애플 농장과 사탕수수 농장으로 배치됐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작업의 종류는 밭일구기와 종묘심기, 김매기, 물대기 또 사탕수수 베기와 운반 등 수확 때까지의 모든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여자의 경우는 모두가 다 이 노동에 참가했던 것 같지는 않다. 사진결혼으로 들어와 하와이에서 여생을 보낸 취재 당시 81살 김순도 할머니의 설명이다.
“밭에 나가서 일을 하지는 않았어요. 사람을 모아서 열 사람이고 스무 사람이고 밥을 해주고 한 달을 치르고 나면 그 사람들한테 돈을 받았죠.”
현규환의 <한국유이민사> 에는 독신자에게 밥을 해주면 한 달에 6달러씩 받았다고 기록돼 있다. 한달 수입 18달러에서 3분의1을 식비로 써버린 셈이다. 그러나 밥 값을 내지 않고 떼먹은 사람도 있다고 적혀있기도 하다.
감독들은 채찍으로 내리 치고…
하와이 이민의 서러움은 돈을 받고 정당하게 일하는데 있지 않다. 감독하는 백인들의 횡포를 그들은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조금만 게으름을 피워도 감독은 가죽 채찍으로 사정없이 내리 쳤다.
작업 중에는 잡담을 하거나 담배를 피울 수도 없었다. 만일 어길 때면 역시 채찍세례를 받기 마련이었다. 결국 이민이라기 보다는 강제 노동이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우리 이민들은 이들 감독관을 <슈퍼맨> 또는 <십장> 이라고도 불렀었다.
LA에서 살고 있었던 당시 83살 신경애 할머니의 얘기를 들어보자.
“농장일을 안하던 사람을 사탕농장 제일 험한 곳에 갖다 놓았으니 일을 하긴 해야되지 않아요? 그런데 일을 잘 못하면 큰 슈퍼맨(수퍼바이저, 감독)이 말을 타고 채찍을 가지고 때렸대요. 그리고 할 줄을 모르니까 힘이 들고, 게을러지고, 그나저나 할줄을 알아야 어쩌지… 그래서 어떤 이는 자다가 들키고, 그러면 말탄 사람이 여지없이 나타나서 채찍으로 때렸대요. 어서 일어나라고… 그래서 우는 사람도 많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어째요. 그래도…”
1세 동포들 중에는 채찍에 맞은 일도 없고 본 일도 없었다는 분들도 있다. 초기 이민들이 끌려간 농장들이 20여 개나 돼서 각각 대우가 달랐는지도 모른다.
카우아이섬의 콜로아 농장에서 일어난 일은 제법 통쾌한 대목이 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여생을 보낸 당시 79살 문근숙 할머니의 회고다.
“일할 때 조금만 잘못하면 채찍으로 때리고 심지어 늦게 자고 안 일어나면 문을 열고 방에 들어와 채찍으로 막 때리고 어떻게 그 십장이 못되게 구는지 한번은 한국사람들이 그 사람의 다리를 끌어내어서 실컷 두들겨 주었어요. 그 뒤에 그 사건을 주동했던 닥터 양의 장인이 십장이 됐습니다. 그 십장은 <덕국> 사람이었어요.”
덕국(德國)인은 독일의 중국어식 표현이다. 동포 1세들의 얘기로는 십장의 대부분이 독일사람과 프랑스사람이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정리=천문권기자 [email protected]
☞◇이 기사는 1977년 당시 라철삼기자(동아방송·KBS)가 초기이민자들의 육성 증언을 바탕으로 방송한 내용을 지난해 책으로 펴낸 '아메리카의 한인들'을 정리한 것이다. 또 육성증언이 담긴 방송제작분은 JBC중앙방송을 통해서 1월31일(월)부터 2월16일(수)까지 오전9시40분부터 20분간 13회 방송 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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