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곳에 "경애하는 수령, 김 일성 동지 만세!" 라는 구호가 빨간 색으로 새겨져 있는 것을 보니 김 일성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토록 슬프게 곡을 하던 북한 주민들의 모습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금강산에는 또 "위대한 김 일성 수령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글귀를 비롯해 김 일성, 김 정일 부자와 주체 사상을 찬양하는 수많은 바위의 조각과 기념비를 볼 수
있었다.
그의 육체는 가고 없지만 그의 혼은 북한 주민들과 함께 있는 것일까. 바위에 조각을 해놓은 것을 제외하면 금강산 전체는 거의 미국 국립 공원 수준에 비할 만큼 자연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깨끗한 공기와 물, 며칠만 살다 가면 신선이 될 것 같다.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고 굳은 산이라고 이름 붙여진 금강산은 강원도 고성군, 금강군, 통천군 등 3개 군에 걸쳐 530평방 킬로미터에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22개의 코스 가운데 관광 상
품으로 개발된 것은 만물상, 구룡폭포, 해금강, 동석동 등 4개의 산행 코스로 저마다 개성이 뚜렷하다.
장쾌한 산악 미와 경쾌하게 떨어지는 모습이 절경인 구룡폭포에 사시사철 푸른 담과 맑고 깨끗한 소로 이루어진 구룡폭포 코스, 웅장하고 기괴하며 오밀조밀한 층암절벽이 인상적인 만물상 코스, 수많은 정육각형 모양의 현무암 기둥이 바다 물결 위에 우뚝 치솟은 모습이 신비롭기 그지없는 해금강 코스, 세존영봉 등의 절경을 조망할 수 있는 완만하고 편안한 동석동 코스 등 어느 한 곳 놓칠 수 없는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3박4일의 빡빡하고 아쉬운 일정 중에 직접 가본 코스는 만물상 코스와 구룡폭포 코스. 하지만 여름철에 올랐으니 내가 본 것은 금강산이 아닌 봉래산인 것이다. 다른 코스를 보러 또 와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철쭉과 진달래 화려한 봄의 금강산, 단풍이 고운 풍악산, 설경이 천상에 속한 듯 아름다운 겨울의 개골산을 보러 서너 번은 더 와야겠다는 생각에 그 동안 가까운 그리피스 팍이라도 꾸준히 오르며 체력을 길러야겠다는 결심을 해본다.
첫날 산행에 오른 만물상 코스는 왕복 6킬로미터 정도로 산행에 드는 시간은 약 4시간. 망양대와 천선대를 제외하면 어르신들도 등반하는 데 무리가 없다. 만물상의 천선대에는 "위
대한 수령 김 일성 동지께서는 1947년 9월 27일, 몸소 천선대에까지 오르시어 만물상을 우리 인민의 불굴의 기상의 상징이라고 고시하시었다."는 기념비도 있었다. 삼선암, 귀면암, 절
부암, 만물상 등 천태만상의 바위들이 즐비하고 갖가지 동물 모양의 기암괴석이 줄지어 서있는데 관광 도우미가 들려주는 바위에 깃들인 전설에는 조상들의 풍류와 멋이 한껏 느껴진
다.
만물상에 위치하고 있는 망양대에 올라 쪽빛 동해를 바라보니 가슴이 탁 터 온다. 둘째 날 오른 구룡폭포 코스는 신이 빚어 놓은 듯, 갖가지 형상의 장쾌한 산악 미와 경쾌하고 시원하게 떨어지는 폭포, 눈을 시리게 할 정도로 푸른 담과 소가 신선들의 거처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곳이다. 창터 솔밭, 목란관, 양지대, 구룡폭포 등 수많은 볼거리가 왕복 8킬로미터의 코스에 골고루 흩어져 있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들어갈 수 없다는 금강문은 아치스 국립 공원보다 더한 자연의 신비를 보여주고 있었고 그 물이 옥구슬처럼 아름답다는 옥류동 계곡에는 금방이라도 분홍빛 고운 너울을 입은 선녀들이 부채를 살랑대며 나타날 것 같다.
그윽한 연주담, 봉황새가 날아가는 모양의 비봉폭포,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이 살아 숨쉬는 상팔담은 오르는 길이 힘들지만 천하의 비경이다. 연못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조상 님들인데 졸졸 흐르는 약수에 그럴싸한 이야기 하나 만들어놓지 않았을 리가 없다. 구룡폭포 코스 초반에 나타나는 삼록수는 산삼과 녹용이 흘러내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한 모금만 마셔도 10년이 젊어진다는 전설이 있다. 오르막길에 한 모금, 내려오면서 한 모금을 마셨으니 다시 어린아이가 되었어야 할 텐데, 아무래도 요즘은 약수 물 효과가 늦게 나타나나 보다.
등산로의 군데군데 사복 차림의 북한 안내원들이 서 있다. 안내야 현대 상선의 관광 도우미들이 다 도맡아서 하고 있으니 그들의 실제 역할은 사실 감시이다. 사람 사는 곳 어느 곳과
마찬가지로 개중에는 좀 심술스럽게 보이는 이도 있고 마음 수행을 오래 한 것 같은 대 스님의 표정을 하고 있는 이도 있다. 하지만 북한의 계속된 농작물 흉작 때문인지 뚱뚱한 사
람들은 볼 수가 없었다. 이들은 관광객들 때문에 매일 산행을 한다고 하니 평생 쓰고도 남을 체력을 거저 단련하고 있는 셈이다.
남남북녀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가꾸지 않아도 북한 여인네들은 참 곱다. 산행이 힘들어 한 숨 쉬어가면서 "북조선 여자들, 참 자태가 고와요."하며 칭찬을 했더니, 이 총각 하는
말이, "뭐, 우린 그 정도는 보통이디요." 한다. 서울에 온 북쪽 대표들이 한국 여자 예쁘냐는 질문에 "거, 남남북녀라는 말이 하나도 틀리디 않디요."라고 응답했다나. 그저 느낀 대로 하
는 꾸밈없는 표현이 소박하고 정겹다.
얼마나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내 형제요, 동포인가 하는 생각에 그들과 짧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자꾸만 눈앞이 흐려진다. 내 관광 증을 힐끗 훔쳐보더니, "조국이 그리웠디요?" 하
며 손을 덥석 잡는 북한 총각. 이렇게 하나 둘 씩, 진정으로 마음과 마음이 부딪히며 남북통일의 그날은 다가오고 있는 것이리라. 상팔담 정상에 서니 가슴에 하나 가득 백두에서 한라
까지 온 겨레가 하나가 되어 서로를 꼬옥 껴안게 될 날이 그리 멀지만은 않았다는 희망과 믿음이 밀려든다. 그리운 형제 자매, 동포가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날은 오리라, 꼭 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