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그래도 돈을 주고 싶은데…. 너무 미안하잖아." "됐다. 돈은 무슨 돈 나는 네 딸 봐주면서 돈은 죽어도 못 받는다. 다시는 돈의 돈자도 입밖에 내지 마라."
동생은 햄달새를 내겐 맡긴지 얼마 되지 않아 돈 얘기를 꺼냈다. 동생은 아무리 오빠라지만 맨 입으로 자기 딸을 키워달라는 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양육 비용을 받지 않으려면 하다 못해 매일 저녁 때 내가 1시간씩 하는 수학 과외에 대해서 만큼이라도 사례를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깊게 생각하고 말 것도 없었다. 돈을 받는 그 순간부터 오빠와 여동생 혹은 외삼촌과 조카라는 가족 관계에 커다란 장벽 같은 게 우뚝하니 들어설 것 같았다. 몸이 불편한 건 참을 수 있어도 마음이 불편한 건 참기 힘들다. 누가 마음 불편한 일을 자청하겠는가. 본능적으로 이른바 일체의 수고비는 받지 못하겠다고 했다.
이로써 동생이 햄달새를 조기유학 시키는데 따른 부담은 상대적으로 그리 크지 않게 됐다. 햄달새가 다니는 사립학교의 등록금 등 학비 중국어와 바이올린 등의 과외비 그리고 가족이 늘면서 발생된 추가 생활비가 동생 몫으로 확정됐다. 추가 생활비는 자존심이 상해 받지 않으려 했지만 내 벌이에 여유가 없어 빚을 얻어야 할 판이었므로 동생한테 청구하기로 했다. 햄달새가 오면서 방 1개를 더 늘려 이사해야 하는 바람에 늘어난 아파트 렌트 비용과 자동차 기름값 등이 그 것이었다. 사실 햄달새 학교 픽업과 라이드 그리고 이 곳 저 곳으로 과외를 다니는데 한 달에 자동차로 1500마일 이상을 뛰어야 하므로 휘발유 값도 작은 돈은 아니었다.
햄달새 양육에 따른 돈 문제는 어쨌든 조기 유학을 시작하자마자 깨끗하게 정리됐다. 동생이나 나나 직선적인 성격상으로도 더 이상 신경 쓰거나 불만의 소지가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동생은 형편이 그다지 어려운 편이 아니므로 불시에 생각지도 못한 돈이 들어가게 된다면 나로서는 그때그때 소요에 따라 청구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햄달새를 맡아 기른 지 두어 달이 지나면서 역설적으로 '돈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돈을 받지 않길 정말로 잘했다"는 생각이 어떤 때는 하루에도 대여섯 번씩 들었다. 햄달새를 키운 지 대략 세달 째에 접어들던 어느 날 전자우편으로 동생에게 각종 경비 지출 내역을 전하면서 "돈을 받아가면서는 정말 못할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을 얼핏 내비쳤다. 일종의 푸념일 수도 있었다.
평생 처음 해보는 남의 자식 맡아 기르는 일의 무게감이 견디기 힘들게 느껴졌다.
내 자식 남의 자식 사람을 차별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걸 장애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나는 남의 자식과 내 자식이 생리적으로 잘 차별이 안 되는 부류에 속한다. 나의 어머니가 딱 그런 사람인데 나는 그런 점에서 어머니를 확실히 닮았다고들 식구들은 말한다.
내 자식 키울 때와 똑같은 방식 똑같은 정신 자세로 접근하는데도 불구하고 무게감이 확연히 다르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 자식들과 햄달새의 성격 차이 같은 것도 물론 한 이유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무게감의 차이는 키우는 아이들의 성격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기 보다는 내가 햄달새의 부모가 아니라는 사실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아이 양육에 관한 내 주관은 나름 뚜렷하다. 아니 뚜렷하다 못해 아이들의 기를 질리게 할 만큼 똑 부러진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내 자식이 아닌 조카에게 내 양육 방식을 적용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친부모가 아니면 본질적으로 책임질 수 없는 일을 책임져야 하는 게 그 무게감의 본질이었던 것이다.
# 김창엽 기자의 엄빠일기_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