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같은 제사장] 총체적 위기의 대안
이유정 목사/한빛지구촌교회 예배디렉터
자살을 생각하던 대학생 시절, 최종 도피처로 간 군대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도, 잘 나가던 크리스천 아티스트였지만 지독한 영적 침체를 겪었을 때도 예배가 그 답이었다. 그런 면에서 예배는 내 인생의 아르키메데스 지점이다.
우리가 매주 드리는 회중 예배, 일상에서 드리는 삶의 예배 안에 잃어버린 보물이 숨겨져 있다. 참된 예배는 본질과 타협하지 않는 진정성이다. 이 본질에 목숨 걸지 않을 때 재앙으로 돌아올 수 있다. 이를 알고 힘써 지킬 때 자연적 영적 성숙도 가능하다. 오늘날 기독교는 성숙보다 성공에 목숨 건다. 이는 기독교의 타락이다.
총체적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가 살 길은 예배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예배에 실패해서 망했다. 14세기 종교개혁은 그 핵인 예배개혁(returning worship to the people)을 통해 중세 암흑기에서 탈출했다.
19세기 자유주의는 서구교회의 세속화와 더불어 예배의 강단을 무참히 훼파시켰지만 60년대부터 교단과 교파를 초월하여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예배갱신운동으로 교회의 생명력을 되찾았다.
한국교회도 지난 20여 년간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찬양운동으로 예배갱신의 불이 점화되었다. 덕분에 화석화된 예배에 생명이 흘러들어 역동성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모든 운동이 그렇듯이 본질보다 형식과 트렌드에 매몰된 타락의 조짐이 곳곳에서 들린다.
예배 스타일 논쟁으로 예배전쟁(?)이 난무하는 동안 예배의 대상에 대한 깊은 성찰은 뒷전이다. 참을 수 없는 예배의 가벼움으로 인해 우리의 예배 대상은 이교적 얼굴로 변형되었다.
관영한 죄에 진노하시는 하나님, 철장권세를 깨뜨리시는 예수님의 위엄은 사라지고 액세서리 인형같은 힘없고 귀여운 아이돌 신으로 전락했다. 여름에 홍수가 나면 정작 먹을 수 있는 물을 구하기 힘든 것처럼 요즘 예배는 많지만 정작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위엄과 거룩 앞에 떨며 무릎 꿇고 자복하며 복음적 결단이 일어나는 예배가 부족하다.
예배의 위기는 좋은 악기, 최첨단 멀티미디어 시스템이 없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유창한 설교, 뛰어난 성가대, 실력 있는 찬양팀이 없어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바로 하나님을 만남으로 본질의 변화가 일어나며 존재의 혁명을 가져오는 예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예배의 결과 우리의 눈과 행동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 전쟁과 기근에 고통 받는 나라와 미전도 족속들을 향해 구체적으로 결단하는 예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솔직해 보자.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대한 뜨거운 기대감이 있는가? 예배를 목숨처럼 지켰던 청교도들의 거룩한 신앙처럼 내 안에 예배에 대한 거룩한 열정이 살아 있는가? 일제 강점기와 625 전장에서 목숨 걸고 예배드리던 선배들의 불굴의 의지가 있는가? 살아계신 하나님, 사랑하는 예수님을 뵙는 설레임이 있는가? 불타는 열망이 있는가? 아니면 그저 종교적인 체면과 자기 만족감을 위해 형식적으로 자리만 채우고 있는가?
예배의 본질에 대한 보다 본격적인 논의가 시급하다. 알렉산더 슈메만이 말한 것처럼 세상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모든 본질적인 표현들이 궁극적 ‘준거’를 부여받고 그것들의 최고 깊은 의미가 계시되는 것은 다름 아닌 예배 안에서, 예배를 통해서다. 예배는 모든 것을 규정하는 규범의 위치다.
그래서 예배가 무너질 때 다른 모든 것이 무너진다. 지엽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시간 낭비할 때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 즉,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 십자가 복음에 전율하며, 성령의 감동이 살아있고, 차가운 지성이 불타오르며, 세상을 보는 관점이 바뀌고, 구체적인 결단으로 잃어버린 영혼에게 다가갈 수 있는 그런 예배에 집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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