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경에는 나무 하나와 사과 하나가 있었고 모두가 그것을 나누어 먹었다. 그런데 유럽의 심장부에 젊어서 자신의 파괴적인 잠재력을 깨닫지 못해 불안정한 국가(독일)가 있었다. 따라서 두 번의 끔찍한 전쟁이 잇따라 일어났고 우리 모두가 나름의 방식대로 전쟁을 겪었다. 그 후 동유럽에서는 죽음과도 같은 40년이 시작됐고 서유럽에서는 모페드와 전기 믹서 자동차와 텔레비전으로 꾸며진 낙원에 들어가는 문이 열렸다."
2권 말미의 에필로그에서 보듯 이 책은 유럽현대사를 다뤘다. 한데 몇 가지 미덕을 지녔다.
단순히 사료를 정리한 책이 아니다. 네덜란드의 저널리스트이자 역사가인 지은이가 1999년 1년간 발품을 팔았다. 동서로 아일랜드에서 러시아 남북으로 스페인에서 노르웨이까지 종횡무진하며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교두보 베누빌' '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무슬림이 사는 섬 스레브레니차' 등 20세기 역사의 현장을 찾아 역사의 흔적을 더듬었다.
이 과정에서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인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입장권을 파는 아르바이트생 1차 대전의 빌미가 된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범 등이 그런 예다. 그렇게 해서 사람 냄새가 나는 역사기행이 완성됐다. 일상사이자 민중사이기도 해서 여느 역사책과 달리 이야기책처럼 술술 읽힌다.
지은이는 1900년 세계박람회가 열린 파리를 첫 방문지로 택했다. 사람 몸 속을 들여다 보는 엑스레이 기계와 시속 120㎞로 달리는 증기기관차 등 20세기의 희망과 기대를 상징하는 신기한 물품이 유럽인의 눈길을 끌었다.
그런데 그 이유만이 아니었다. 유대계 프랑스군 장교의 간첩 혐의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드레퓌스 사건'을 조명하기 위해서였다. 가족간에 이혼 사례가 생길 정도로 드레퓌스 옹호 세력과 반유대주의 세력 간의 대립은 치열했다.
지은이는 이 사건은 개인의 권리와 국가의 위신 계몽주의의 진보적 원칙과 반혁명적이 낡은 가치 사이에 '무엇이 더 중요한가?'라는 의문을 제기한 사건이라 풀이한다.
이 책을 보며 '새 유럽의 역사'(프레데리크 들루슈 지음 까치)가 떠올랐다. 국적이 다른 12명의 역사가가 참여해 역사교과서의 통합을 시도한 이 책은 '최초의 진정한 의미의 유럽사 개론'으로 꼽힌다. 하지만 대부분의 역사교과서가 그렇듯 성글다. 굵직한 사건만 다뤘기 때문이다.
한데 마크의 책은 역사의 줄기 사이 사이를 촘촘하게 메운다. 악명 높은 유대인 청소를 결정한 1941년의 반제 회의에 참석했던 15명 중 9명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거나 가벼운 처벌만 받고 제명대로 살다가 죽었다. 히틀러의 최측근이었던 알베르트 슈페어 같은 테크노크라트들이 묵묵히 홀로코스트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보통시민들도 합세했다. 통념과는 달리 게슈타포가 유대인을 직접 적발한 사례는 전체의 19%에 불과했다. 41%는 시민의 밀고에 의해 이뤄졌다. 독일 국민의 60%가 나치당원이기도 했지만 정치적 신념 때문만이 아니었다. 강제 이송시킨 유대인의 집 7만2000채에서 약탈한 재산이 독일 전역에 분배됐다.
역사학자 프랑크 바요르가 "현대사에서 가장 대규모로 벌어진 '재산교환'으로 그런 약탈에 참여하는 독일인이 점점 늘어났다"고 지적했다. 이런 사실 어떤 역사책에서 만날 수 있을까.
선량한 보통시민들의 이 같은 공범행위를 보며 85년 출간된 '침묵의 뿌리'(조세희 지음 열화당)가 생각났다. 80년 사북사태를 탐사한 이 사진에세이집은 우리에게 묻는다. "오늘이 다시 역사가 되는 날 당신은 당시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고. 침묵은 곧 동조가 아니냐고.
지은이는 유럽 각국에선 2차대전의 깊은 상흔을 치유하기 위한 '신화'를 지적한다. 영국은 제국의 상실을 런던 대공습으로 덮었고 프랑스는 부끄러운 비시 시대 를 드골과 레지스탕스란 영광스런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심지어 독일도 히틀러를 '사악한 악마'로 몰아 나치스를 '다른 사람'인 양 몰아갔다.
유럽연합은 27개국 4억 5000만 명이 북적이는 세계 최대의 경제권이다. 뿐만 아니다. 미국의 제러미 리프킨에 따르면 인류의 미래를 위한 거대한 실험실이기도 하다. 그에 따르면 유러피언 드림은 경제 성장과 개인의 이익 추구를 무한정 강조하는 아메리칸 드림과 달리 유러피언 드림은 지속가능한 발전과 삶의 질 공동체의 성장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초정(초청).결석재판(궐석재판) 등 소소한 오.탈자나 역사책치고는 사실이 틀린 부분이 있다는 흠결에도 전체로서의 유럽을 보는 길잡이로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1913년 여성 참정권을 요구하는 깃발을 흔들며 영국 경마장 트랙의 달리는 말에 뛰어들어 사망한 에밀리 데이비슨의 한마디만 얻어도 책값은 충분히 하지 싶다. 그는 그랬다. "한 사람의 큰 슬픔으로 많을 사람의 슬픔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편하게 살려 한다면 중대한 피해를 막을 수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