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짓달 하순쯤에는 내 생일이 들어 있다. 생일날 아침에 서로 격조했던 선배언니가 전화를 주셨다. “정선생, 오늘이 귀 빠진 날이지” “기가 빠졌다니요?” “기가 아니고 귀빠진 날이라고 했지. 아니, 국어선생을 그렇게 오래 하고도 이 말 몰랐어?” “내 국어책에는 그런 말 없었는데...” “하하하 생일 축하해.”
생일만 되면 나는 꼭 내 큰고모가 생각난다. 내가 고국을 떠나오는 해까지 내 생일에는 한번도 거르지 않고 큰고모는 닭을 잡아들고 집에 오시곤 했다.
나는 큰고모의 등에서 자랐다. 큰고모는 아이(나)를 허리와 가슴 중간 쯤에 바싹 비틀어 매 아이를 업었는지, 막대기를 하나 댔는지 분간이 안가게 하고는 고무줄 넘기도 하고, 땅치기도 하고, 술래잡기도 했다고 한다. 내 어머니는 아이의 젖때가 되어 자꾸 밖을 내다 보게 되는데 한번 아이를 업고 밖으로 휭 나간 시누이는 노는데 정신이 팔려서 제 배가 정 고프지 않으면 들어오지를 않았다고 했다.
어떤 때는 골목이 어두워질 때야 들어왔는데 아이를 풀어놓으면 기저귀와 고모의 등까지도 온통 물탕이고 고모의 등에서는 지린내 나는 김이 모락모락 솟았다고 했다. 동네 어귀에는 ‘동척’(동양척식회사의 준말로 일제가 우리의 땅을 약탈하기 위해서 세운 회사)의 농원이 있어 그 넓은 땅에는 때를 맞춰 딸기,오디,사과가 열렸다. 큰고모는 나를 업은 채 철망을 들어 올리고 들어가 훔친 과실을 포대기 띠끈 끝에 매고 나오곤 했다니 지금 생각해도 가시철망에 내 등이 찔린 흠이 없는 것이 신통하기만 하다.
소학교만 나와 차령관의 같은 제재소집으로 출가한 큰고모는 봄 가을 두 차례씩 근친을 오셨는데 그때마다 많은 ‘무라디(친정 다니로 올 때 가지고 오는 음식과 선물의 평안도 사투리)’를 들고 오셨다. 그 속에는 언제나 내 옷과 베레모자가 들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큰고모가 친정에 오실 때 쯤이면 학교에서 곧바로 돌아와 댓돌 위에 새 하얀 고무신이 있는가 살피곤 했다. 우리와 큰고모 가족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3.8선을 넘었다.
내리 세 번이나 유산 끝에 치성을 드려 얻은 아들 지성이가 장성하자 큰고모는 방방곳곳에 매파를 놓아 골라골라 며느리를 얻었다. 큰고모는 아들을 장가보낸 이튿날부터 고부갈등의 늪에 빠져 들었다. 한남동 일대에 재산이 널려 있는 알부자인 큰고모이긴 해도 먼 길이건 가까운 길이건 버스를 이용하셨다. 무엇이나 헤프게 쓰는 며느리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속이 탈때면 큰조카인 내 집에 들리셨다.
아랫목에 베개를 대고 가지런하게 누우면 큰고모는 틀니를 뽑아 머리맡에 놓고 갑자기 허물어든 입으로 “옥이야, 내레 너같은 딸이 하나 있으문 얼매나 좋갔네”하시고 “이건 시어미가 한 마디하면 저는 열 마디도 더하고 길길이 뛰어.”
나는 속으로 어떻게 하면 답답해서 찾아오신 큰고모의 마음을 풀어드릴 수 있을까 해서 “첫 인상부터가 앞이마가 불거져 나온 것이 보통내기로 안 보였어. 좀 순하게 생긴 여자를 구할 걸 그랬어요.”하자 “지성이 눈치 보느라고 그랬지.”하셨다. 며느리와의 사이가 날이 갈수록 태산이었다.
큰고모는 참다못해서 삼각산 기도원에 들어가 금식기도를 시작하셨다. “그때 목사님께서 신주같은 곳에 자기가 제일 미워하는 사람의 이름을 써 넣고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시며 나 아닌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니 나를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시더라. 사흘 낮과 밤을 기도했더니 가슴이 후련해지고 누구든지 용서할 수가 있을 것 같았어.
집에 왔더니 지성이가 오셨수하고 나가고 며느리가 칼날을 세운 눈으로 내 가슴을 휘익 그으며 문을 탕 닫고 나갔어. 이럴 때 난 어떻게 해야 하니?” 큰고모는 울고 계셨다.
“요망한 것 같으니라구. 천하에 없는 악독한 X집이였구나. 왜 저한테 곧 전화를 주시지 그랬어요. 가서 혼쭐을 좀 내주게. 지성이를 고모가 어떻게 키웠는데.”
나는 일부러 더 일어났다 앉았다 하고 천정을 향해서 손사래도 치며 분을 삭였다. 영창으로 새들어 온 달빛이 심신이 오그라든 한 노인의 옆 얼굴을 초라하고도 가엾게 비추어 주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큰고모가 빨리 시어머니의 당당했던 권한이 이미 오래 전에 며느리에게 넘어간 시대가 된 것을 깨닫게 되었으면 싶었다. 새벽녘에야 잠깐 잠이 들었다가 깬 나는 큰고모의 머리맡에 놓아 둔 자리끼 그릇에 붉그레한 틀니가 잠겨 있는 것을 보였다.
내가 한국을 떠나오던 날 오른손은 내 어머니가, 왼팔은 큰고모가 잡고 “늘 조카가 아닌 딸이라 생각했는데...”하신 큰고모. 이 생일 아침에도 나는 ‘큰고모가 어떻게 지나시나...’하고 생각하고 큰고모는 ‘오늘이 우리 옥이 생일인데...’하고 생각하고 계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