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시대 로마제국은 분봉왕(로마 정권에 의해 임명된 지역의 1/4 정도를 다스리는 통치자)을 세워 대리 통치하거나 총독을 파견하는 방식으로 식민지 유대사회를 통치하였다. 유대사회를 통치한 총독은 모두 13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신약성서가 이름을 언급하고 있는 총독으로는 빌라도 벨릭스와 베스도가 있다.
로마의 초대 황제(가이사)였던 아우구스투스는 유대와 사마리아와 에돔 지역을 통치하기 위하여 분봉왕(헤롯 가문)을 세웠지만 그들의 실정에 신물 난 유대지역 백성들은 잇따른 소요와 폭동을 일으켰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기에 유대지역 백성들은 헤롯 가문의 통치를 받는 대신 로마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게 해달라고 가이사에게 호소하였다. 그 이후부터 일부(갈릴리)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로마가 파송한 총독이 통치하였다. 이것은 유대 땅이 총독에 의해 통치받음으로써 자치권이 더욱 제한된 것을 의미하였다.
유대 속주를 다스린 로마 총독들은 대개 유대인의 독특한 종교와 생활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예 무시하고는 자기 멋대로 철권을 휘두르며 통치하기가 일쑤였다. 유대 사회를 통치한 총독들 가운데 벨릭스가 가장 전형적인 탐관오리였음을 역사는 증언하고 있다.
본디 노예 출신이었던 벨릭스는 자유민의 신분을 얻은 후 유대의 총독자리까지 올랐다. 벨릭스가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클라우디우스 황제(로마의 제 4대 황제)와 친분 관계를 맺고 있던 그의 형 팔라스(Pallas)의 정치적 지원 때문이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벨릭스는 자신의 비위에 거슬리는 인물을 제거하기 위하여 암살자를 고용할 정도로 잔인하였다 한다. 또한 총독의 지위를 이용하여 뇌물과 여자를 취하였던 탐욕스런 인물로 그를 평하였다. 벨릭스 이후 몇 년 뒤 유대지역 총독이었던 알비누스는 벨릭스가 뇌물을 받고 반란에 가담했던 죄수들까지 풀어주었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돕기 위해 이방교회로부터 모금한 헌금을 들고서 예루살렘을 방문한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의 고소로 체포된 사건이 있었다. 로마 시민권자였던 바울은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압송되기 전에 가이사랴 빌립보에 이송되어 그곳에서 총독 벨릭스와 대면하게 되었다.
벨릭스가 바울이 모금한 돈을 취할 수도 있다는 기대감과 바울을 고소한 유대인의 환심을 사고자 그를 구류해 두었다고 기술한 누가의 진술은 정확하다 하겠다. 이러한 누가의 증언을 뒷받침하듯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벨릭스가 '노예의 마음을 가지고 왕의 권세를 휘둘렀던 인물'이었다고 악평하였다.
비천한 출신 성분에도 3명의 왕실 출신 아내들을 차례로 거느린 벨릭스는 결혼도 정략적으로 이용할 만큼 그의 탐욕은 그칠 줄 몰랐다. 개중 헤롯대제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막내딸이자 헤롯 아그립바 2세의 누이동생이었던 드루실라는 매혹적이고 미모가 뛰어난 여인이었다.
'피의 대학살'을 자행하여 유대인들의 폭동을 잔인하게 진압했던 벨릭스는 유대인들이 황제에게 제소한 진정으로 로마로 소환되어 결국 그의 정치적 생명도 끝났다.
벨릭스 앞에서 의와 절제와 오는 심판에 대해 설교한 바울의 외침이 그의 종국과 오버랩되면서 묘한 여운을 남긴다. 그러나 이러한 파멸이 어디 벨릭스만의 경우인가? 누구나 언젠가는 하나님의 최후 심판대 앞에 설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종말)'가 기다리고 있음을 상기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