냇 킹 콜이 부른 ‘아마도, 아마도, 아마도(Perhaps, Perhaps, Perhaps)’의 스패니시 버전이 느릿느릿 가슴을 파고들 때 그 여자는 어둡고 좁은 골목을 걸어간다. 표정 없는 얼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흔들리는 잘룩한 허리는 손 끝에 대롱대는 국수통처럼 애잔하다. 그 여자가 국수를 사러가는 골목길은 낮에도 어둑하게 가라앉고 벽에 붙은 낡은 광고지는 계단 끝에 달려있는 가로등의 빛을 받아 더욱 애잔하다.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In the Mood for Love)’는 쓸쓸하지만 환한 표정으로 60년대의 홍콩을 추억한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란 뜻의 ‘화양연화’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옛날을 고개돌려 바라보며 회한에 젖는다. 초우모완(양조위. 영어이름 토니 륭)과 수리젠(장만옥. 영어이름 매기 청)이 만나는 배경은 세월에 풍화돼 아련하다. 헤어짐을 예감한 수리젠은 색바랜 벽보가 휘장으로 드리운 골목에서 초우모완의 어깨 위로 고개를 떨군다. 카메라 감독 크리스토퍼 도일은 녹슨 쇠창살 뒤에서 두 사람의 이별을 바라본다. 퇴색한 배경과 달리 기억의 눈은 두 주인공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수리젠의 화려한 원피스와 기름을 발라 넘긴 초우모완의 단정한 머리는 쓸쓸한 배경과 대비되며 상실감과 애잔함을 키운다.
같은 날 같은 집으로 이사한 초우와 수는 아내와 남편이 바람피는 것을 눈치채면서 가까와진다. 두 사람의 만남은 집과 사무실, 음식점, 다방, 호텔, 골목길, 택시 같은 좁은 공간에서 이뤄진다. 이들의 만남은 감독의 기억의 방에 남아있는 홍콩. 상하이에서 태어나 5세 때 부모를 따라 홍콩으로 온 왕감독은 자신을 키운 홍콩을 유부남과 유부녀의 사랑으로 회상한다. 중국도 아니고 영국도 아닌 홍콩이라는 공간을 사랑으로 표현한다면 유부남과 유부녀의 만남쯤 되지 않을까. 그래서 그들의 사랑에는 중년의 노골적인 애욕이 없다. 오히려 택시 안에서 손을 잡으려 하거나 살짝 옷깃을 만지는 풋풋함을 풍긴다.
홍콩의 중국반환을 돌이킬 수 없듯이 두 사람의 사랑도 이루어질 수 없다. 대부분의 장면을 방콕에서 찍어야 했을 만큼 왕감독의 홍콩은 이제 지도에 없다. 영원히 기억 속에 살아 있을 뿐이다. 그는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졌지만 자신을 키워준 홍콩에 ‘가장 아름다왔던 시절’이라는 제목의 헌시를 바친다. ‘화양연화’는 아마 이 도시에 바친 가장 아름다운 영화일 것이다.
왕감독의 기억 속에 남은 홍콩은 어떤 모습일까. 초우모완이 앙코르 와트의 거대한 돌벽에 난 구멍에 수리젠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고 이를 잡초로 봉인함으로써 둘의 사랑은 영원히 가슴에 묻힌다. 카메라는 세월의 버짐으로 뒤덮인 거대한 궁륭과 어두운 회랑, 그림자 길게 드리운 석벽을 마지막처럼 찬찬히 돌아본다. 앙코르 와트는 거대한 기억의 사원으로 화면을 압도한다. 이제 그곳엔 아무도 살지 않는다. 가슴에 묻힌 도시는 외롭게 잿빛으로 풍화할 뿐이다.
“이제 그 날은 갔다. 옛날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그의 전작처럼 ‘화양연화’도 상실감과 뿌리뽑힌 삶을 얘기하지만 아주 슬퍼하지는 않는다. 홍콩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흔들리고 집주인 수엔(레베카 팬)도 딸들이 있는 미국으로 떠날 채비를 하지만 수리젠은 홍콩에 남아있다. 수리젠이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외출하는 한 홍콩은 계속된다.
2일 개봉. 등급 PG. Landmark’s Westside Pavilion Cinemas(310-475-0202)·Laemmle’s Monica(310-394-9741) 상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