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사람 모르는 길을 수없이 만나고 헤어진다. 혹 기억하고 있는 것이 변하진 않았는지 찾아나선다. 산 바다 꽃… 여행에서 보는 것은 정해져 있지만 느낌에는 제한이 없다. 그것이 바위 하나 모래 한 줌 단 한 마디뿐인 타인의 친절이라 해도 추억이 되고 의미가 된다.
애리조나는 심심하게 보이는 곳이다. 그랜드 캐년과 세도나 끝없는 사막과 황토 빛 바위뿐. 투산행 비행기에 오르며 '뭔가 새로운 것'을 기대하진 않았다. 숨가쁜 LA생활을 잠시 잊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다.
투산은 오래된 도시다. 도심의 번잡함을 벗어나 자연스런 고요함을 느끼게 해 준다. 아직도 여러 인디언 부족들은 이곳을 '집'이라 생각하며 수천 년 동안 이어져온 자신들의 문화를 굳세게 지키고 있다.
애리조나 스테이트 뮤지엄에 들어서자마자 나바호.아파치.호피 등 인디언들의 생활상이 유물을 통해서 보였다. 낚싯대 돌 바구니 담요 그릇 등 생활용품이 대다수다. 백인들의 공격에 땅과 삶을 뺏긴 그들의 과거를 비디오 영상으로 보며 어떠한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을 따르고 소박한 행복을 꿈꾸던 그들에겐 힘이 없었다. 춤과 노래 도자기를 구우며 아픔을 잊어가는 모습이 마음을 울린다.
쭉 뻗은 길을 따라 달리니 삼지창 모양의 선인장들이 하늘을 향해 솟아있다. 장관이다. 전국에서 오직 투산에서만 볼 수 있는 이 선인장의 이름은 사구아로(Saguaro). 수백 년 동안 같은 자리를 지켜온 뚝심 있는 존재다. 땅과 하늘 그 사이에 초록빛 선인장 밭만 보인다. 드넓은 이곳에서 인간은 너무나 작다.
황량한 기분이 들 때쯤 서부영화 촬영지로 유명한 테마파크 '올드 투산'(Old Tucson)에 도착했다. 이곳은 존 웨인이 리오 브라보(1959년) 엘도라도(1966년) 등 4개 영화를 찍은 곳이다. 하긴 먼지 나는 사막과 선인장이 널린 이곳이 아니면 어디에 가겠는가. 아직도 '은행' '마굿간' '철물점'과 같은 오래된 간판이 그대로 달려 있다. 슬쩍 옆을 보면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말을 타는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띈다.
10월의 투산은 LA의 봄날씨다. 아침 일찍 선인장 과육이 들어있는 이지스 셰이크를 마셨다. 알로에 씹는 맛이다. 걷기가 싫어 사비노 캐년(Sabino Canyon) 관광객 지프에 오르니 비바람에 깎인 희귀한 바위와 거의 말라버린 연못 산불에 타 밑동을 드러낸 나무들이 몸소 역사를 보여준다.
다시 번잡하고 치열한 경쟁이 끊이지 않는 LA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 "투산은 왜 갔어요?"라며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말을 걸어 온다. 와이오밍주에서 건축업을 하는 제프란다. 그와 함께 학교 회사 스포츠 등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주위에 앉은 5~6명이 한꺼번에 관심을 보인다. 마치 대학 동창회를 갖는 분위기다. "아니 그래서 그 쿠바 식당 없어졌다고?" "50년 전 내 생일파티 그 술집에서 했는데" "스툽스(Mike Stoops.애리조나대 풋볼 감독)는 왜 잘리는 거야?" "우리 이러다가 투산 맛집 가이드북 내도 되겠어요(웃음)"… 누군가와 오래된 추억을 공유한다는 것은 참으로 멋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