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은 깜깜하다, 소리만 들린다, 아기 울음소리
얼마나 울었는지 바싹 마른 소리…서서히 화면이 밝아진다.
“오늘 또 한명의 아기가 살았습니다. 생명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USC 영화과 재학생 브라이언 아이비(Brian Ivieㆍ21)가 각본, 제작, 연출하는 다큐멘터리 드롭 박스(Drop Box)의 첫 장면이다. 드롭 박스는 서울 난곡동 주사랑공동체에 설치된 영아의탁 바구니를 말한다. 일명 베이비 박스다. 부모가 원치 않는 아기를 두고 갈 수 있는 박스다. 버려지는 아기들은 대부분 장애아다. 당초 선한 의도에서 시작됐지만 이 박스는 영아 유기 조장 논란으로 존폐 위기에 처했다.
아이비는 LA타임스를 통해 베이비 박스의 슬픈 사연을 접하고 영화를 찍기로 했다. 전세계에 버려지는 아기들의 실상을 전하고, 주사랑공동체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다. 한인들이 무관심한 사이에 아이비는 촬영팀을 꾸리고 인터넷으로 제작비를 모금했다. 12월15일 아이비는 촬영팀 10명과 함께 한국으로 향한다.
"베이비 박스 작품을 통해 그간 배우고 깨달은 모든 것을 하나로 녹이겠다
-Bryan Ivye-
영화는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헌신의 도구
봉준호 감독의 극과 극 연결하는 솜씨 반해
-다큐멘터리 제작비는 마련했나.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다. 목표금액인 4만 달러를 넘어서 4만4000달러가 모였다. 특히 중앙일보 기사가 나간 뒤 익명의 독지가가 2만5000달러의 큰 돈을 기부했다. 감사하다."
-후원자들의 반응이 어떤가.
"기대가 높다. 그런데 한가지 흥미로운 일이 있다. 같은 질문을 여러 번 받았다. 미국에서도 아기들이 버려지는데 굳이 한국까지 가야 하느냐고 물어보는 분들이 많았다."
-뭐라고 대답했나.
"한국만이 아니라 전세계에서 버려지는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다. 그 슬픈 사연을 시작할 수 있는 곳이 한국이기 때문에 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에 베이비 박스가 설치된 주사랑공동체는 가장 설득력있고 강력한(Compelling) 출발점이다."
-다큐멘터리는 언제 볼 수 있나.
"12월15일부터 30일까지 2주간 한국에서 촬영한다. 편집 작업이 오래 걸릴 듯 하다. 내년 6월쯤 공개하겠다."
-제작 후 홍보 계획은.
"부산국제영화제와 선댄스를 통해 영화를 소개한다. 그 전에 전국 투어를 다니며 미리 알릴 계획이다. 닉 부이치치(세계적인 희망 전도사. 날 때부터 팔다리가 없다)와 함께 각 도시를 방문해 강연회도 연다."
-이 영화 한편으로 뭘 할 수 있나.
"변화의 시작은 되지 않겠나. 짧은 영상 하나가 세상을 바꾸는 일은 많다."
-스물한 살밖에 안됐는데 세상을 다 아는 듯하다. 어렸을땐 어떤 아이였나.
"영화를 좋아해서 그런 것 같다. 고등학교 1학년 때 45분 장편영화를 처음 찍었다. 지역영화축제에도 초대됐다. 같은 해에 지역언론 영화칼럼니스트로 2년간 글을 연재했다. 그러고 보니 조숙했던 것 같다."
-USC 영화학과는 영화전공의 하버드라고 하더라. 본인이 특별났다고 생각했나.
"나보다 잘하는 학생들이 얼마나 많았겠나. 칼럼을 썼고 영화를 찍은 포트폴리오가 점수를 받은 것 같다. 내 생각인데 기술을 가르칠 수 있지만 열정은 가르칠 수 없다고 심사관들이 생각하신 것 아닐까."
-왜 영화 감독이 되려했나.
"꼬마의 단순한 꿈이 조금씩 발전한 것 같다. 영화가 좋다보니 촬영현장에서 일하고 싶어졌고 메가폰을 잡게됐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클래식 영화들이다. 1930~1968년까지 프로덕션 코드(영화제작강령)에 의해 영상물을 규제하던 시절 만들어진 영화다. 사전검열이라고 비난하지만 그 엄격함 때문에 단단한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카사블랑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아직도 상영되고 사랑받는 명화다. 그 중에서 '대탈주(The Great Escape)'를 가장 좋아한다." (※대탈주는 스티브 맥퀸 제임스 가너 찰스 브론슨 등 당시(1963년 개봉) 촉망받는 할리우드 신예 배우들이 총출동한 대작이다. 신세대들은 듣지도 못했을 이 영화에 대해 아이비는 "전쟁 영화가 아니라 다양한 인간 군상을 담은 사람 영화"라고 소개했다.)
-컴퓨터그래픽 영상물 세대가 아닌가. '아바타'나 '반지의 제왕'은 어떤가.
"블록버스터는 좋아하지 않는다. 보긴 하지만 변질되기 쉬운(perishable) 영화다."
-롤모델로 꼽는 감독은.
"피터 위어 감독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를 비롯해 그의 영화에는 사람이 살아있다. 관객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본인의 영화들을 소개한다면.
"장.단편 영화 6편에 연극 한 편을 연출했다. 더 크고 선한 목적을 향해 진화(evolving)하고 있는 것 같다. 홈리스를 찍으면서 영화와 사회적인 캠페인의 연계를 구상했고 애플 시드로 종교적인 역할을 깨달았다."
-베이비 박스는 어떤 의미인가.
"그간 배우고 깨달은 모든 것들을 하나로 녹일 작품이다. 영화를 왜 만들어야 하는지 일깨워준 촉매제(catalyst)다. 기독교인으로서는 영적 역할을 깨닫게 됐다."
-한국하면 생각나는 것은.
"한반도의 관점에서는 분단(divided)이다. 천안함 침몰 사건도 신문에서 관심있게 읽었다. 한국을 말하자면 하나의 무대다. 모든 극적인 요소가 담겨 있다. 높은 자살률이라든지 내 나이 또래 대학생들의 중압감도 들었다."
-한국 영화는 봤나.
"봉준호 감독의 'Host(괴물)'와 'Mother(마더)'를 봤다. 천재적인 감독이다. 코미디와 드라마 액션 감동이 하나의 사회적 이슈로 귀결된다. 웃음에서 눈물로 눈물에서 웃음으로 코드가 자연스럽게 전환된다. 두 가지 상반된 코드를 한편에 녹이는 작업은 관객 입장에서는 쉬워보이지만 균형을 잃으면 둘 다 잃기 쉽다. 기회가 된다면 꼭 만나보고 싶다."
-본인에게 영화란.
"헌신(dedication)이다. 소외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도구다."
-돈 되는 졸작이 있고 돈 안 되는 수작이 있다. 어떤 영화를 찍겠나.
"블록버스터 영화는 나 말고도 할 사람이 많다. 나는 메시지 없이 단순히 때려부수고 피가 터지는 영화는 싫다. 사람 이야기를 찍고 싶다. 컴퓨터 그래픽이 아무리 최첨단이라고 해도 사람의 웃음과 눈물은 못 이긴다고 믿는다."
정구현 기자 [email protected]
브라이언 아이비는
▶1990년 9월27일 글렌데일 출생
▶백인 아버지 윌리엄씨와 일본인 3세 어머니 토미, 남동생 케빈
▶샌 클레멘테 고등학교, USC 영화/텔레비젼 학과 3학년 재학중
▶15세에 첫 영화 장편 ‘시에라 스트리트’ 제작
▶같은 해 선포스트뉴스 등 2개 지역신문에 영화칼럼니스트로 연재 시작
▶2009년 영화제작사 플래시벌브 엔터테인먼트 창립(단편 5편, 장편 1편, 연극 1편 극본, 제작, 연출)
▶한국의 버려지는 아기 실태 다룬 첫 다큐멘터리 ‘드롭 박스’ 제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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