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쁠 때, 소주는 웃음이 되어줬다. 내가 슬플 때, 소주는 눈물이 되어줬다. 청춘을 예찬할 때도, 나이 들어 쓸쓸해 질 때도, 소주는 내 곁을 지켰다. 가끔은 친구이자 연인이고, 또 가끔은 ‘왠수’다. 그 앞에 모여 앉아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하기도, 무거운 침묵 속에 묵묵히 잔만 비우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소주는 낭만이고 인생이다. 소주잔 속에 우리네 삶이 찰랑찰랑 담겨있다. 일년 중 소주와 가장 가까워지는 시기. 오늘은 소주 이야기를 안주 삼아, 소주 한잔을 걸쳐본다.
소주잔에도 철학이 있다. 세대에 따라 사고방식이 바뀌고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듯 주도도 바뀐다. 그래서 소주잔의 철학도 조금씩 바뀌어 왔다.
그 바로미터는 '능선'이다.
어디까지 소주를 따르느냐에 따라 세대가 보이고 그들의 주도가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철학이 보인다. 70년대 이전 술을 배운 50대 이상 장년층은 빈틈없이 찰랑거리게 소주잔에 술을 담는다. 따르는 사람 입장에선 '넘치는 사랑'이며 받는 사람 입장에선 이 자리에 나와 마주 앉은 너에게 '올인'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하지만 80년~90년 초 술을 배운 30~40대는 7~8부 능선까지만 술을 따르고 받는다. 물러날 곳 없이 술잔을 채우고 비워야 하는 소주 문화가 부담스러운 젊은 세대가 조금은 뺄 수 있는 여지 숨 돌릴만한 공간을 마련해 놓는 것이란 해석이다. '원샷' 문화가 술자리를 지배하고 '꺾어마시기'가 수치로 여겨지는 분위기가 생기며 가장 부담없이 한번에 소주잔을 비울 수 있는 적당량이 소주잔의 7~8부 능선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란 이야기도 있다.
20대 젊은 세대들의 소주잔 능선은 더 내려갔다.
5~6부가 고작이다. 취향이 확실해서다. 이들에게 억지로 입에 안 맞는 술을 마시게 하는 것은 고문이나 다름없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는다. 그래서 편한 만큼 따르고 내키는 만큼만 마시는 거다. 잔을 부딪치고 입술만 살짝 적시는 '키스샷'이란 용어도 그래서 나왔다.
소주잔에 철학이 있다면 소주병 350ml에는 과학이 있다.
소주 1병은 소주잔에 가득 담을 경우 7잔 7~8부로 따랐을 경우 8.5잔이 나온다. 왜일까. 소주를 혼자 마시는 사람은 많지 않다. 둘이 먹어도 셋이 먹어도 결국에는 한 잔이 모자라 또 다른 1병을 추가 주문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는 것은 유명한 속설이다.
소주광고 '여인천하' 왜일까?
소주 광고 포스터 법칙 소주병은 오른쪽 하단 배치 소주잔은 반드시 오른손에 소주·고춧가루 법칙 발열 심해져 면역체계 오히려 '득보단 실' 롤러코스터 소주 도수 첫 진로 소주는 35도 지금은 15.5도까지 내려가
◇ 소주는 미녀를 좋아해
당대 최고 인기의 미녀 스타를 판단하는 기준은 소주 광고를 찍느냐 못찍느냐로 판별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주 광고=미녀 모델'로 설명되는 공식이 생긴 것은 의외로 그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1999년 '참이슬' 광고가 그 시초였다. 그렇다면 그 모델은 누구였을까. 바로 이영애다. '깨끗한 소주'의 이미지를 내세우는 동시에 '오늘 저녁 한잔해요!' '한잔 드리고 싶어요' 등의 카피로 대박을 치며 미녀 모델 소주 광고의 시대를 당당히 열었다. 이후 황수정, 박주미, 김정은, 김태희, 성유리, 남상미, 김아중, 김민정, 하지원, 손담비, 이민정, 송혜교, 신민아 등이 소주 모델로 수많은 음식점의 벽면을 장식했다.
이효리는 2008년부터 지금까지 롯데주류와 무려 7차례나 계약을 갱신하며 '처음처럼'의 광고 모델로 활약, 최장수 소주모델의 기록을 세우게 됐다. 수년전까지만 해도 이들이 등장하는 소주 광고 포스터에는 두가지 불변의 법칙이 있었다. 첫 번째는 소주병은 오른쪽 하단에 똑바로 세워야 할 것. 소주병이 기울면 사세가 기운다는 속설 때문이었다고 한다. 두번째는 소주잔을 반드시 미녀 스타의 오른손에 들게 할 것. 이는 왼손으로 술을 받는 게 주도에 크게 어긋난다는 사람들의 고정관념 때문이었다는게 광고계 사람들의 설명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보다 튀고 새로운 광고 포스터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기 위해 색다른 구도나 포즈로 만들어지는 소주 광고도 늘어나고 있다.
* 오늘의 수다 포인트 : '역대 최고의 소주 모델은 누구? 훌륭한 소주 광고모델의 싹수가 보이는 걸그룹 멤버는 누구?'
◇ 소주 + 고춧가루= 감기 잡는 명약
감기에 걸렸다며 술자리에서 빼는 사람들을 보면 주당들은 '소주에 고춧가루 풀어 마시고 땀 한 번 푹 뺀 후 자고 나면 싹 낫는다'는 '민간요법' 처방을 내리고들 한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의학적으로는 아예 근거 없는 말도 아니라고 한다. 고춧가루에 포함된 비타민 C와 캡사이신이 피로회복과 기초대사를 도와 일시적으로 증상을 완화하고 면역력을 증강시킬 수도 있다는 것.
하지만 고춧가루와 소주가 만났을 때는 득보다 실이 훨씬 많다. 감기는 대부분 열을 동반하는데 소주에 고춧가루를 타 마시면 발열이 더 심해져 바이러스와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면역체계를 무너뜨리는 꼴이 되고 만다. 거기다 술을 마시면 체내 수분이 빠르게 고갈되는데, 감기열로 빠져나가고 있는 수분에 술로 인한 수분 증발까지 더해 탈수 부채질하는 격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의료진은 고춧가루를 타서 먹으려거던 콩나물국에, 마시고 자려면 일반 생수를 택하라고 조언한다.
감기약과 소주도 상극이다. 졸음 부작용은 더 심해지고, 약과 술을 해독하는 간의 부담도 배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타일레놀 등 해열진통제 계열에 들어있는 아세트아미노펜 성분은 간에 무리를 주기 때문에 알코올과는 절대 함께 복용해서는 안되는 약이다.
* 오늘의 수다 포인트 : '소주에 고춧가루 타먹고 감기 나았다는 A는 희대의 사기꾼', '아예 집에서 약소주를 만들어 마시자.'
◇ 소주 도수는 롤러코스터
지금까지 소주 도수는 크게 11번이 바뀌었다. 진로가 1924년 소주를 처음 출시했을 때, 당시 증류식 소주의 도수는35도였다. 65년 증류식에서 희석식 소주로 바뀌면서 도수를 30도로 낮춘데 이어 70년대 25도 시대를 열었다. 그러다 1998년 진로가 2도 낮춘 23도 ‘참이슬’을 내놓으면서 91일 만에 100만 상자를 판매해 최단기간 판매 신기록을 세웠다. 이후 참이슬의 독주시대가 계속됐다. 그러자 2001년 강원도 지역 소주인 ‘경월’을 인수한 두산에서 22도인 ‘산’을 내놓으며 맞불작전을 폈다. 참이슬도 22도로 도수를 낮췄다. 다시 3년 뒤인 2004년 두 회사는 동시에 21도 제품을 출시했다.
더 이상 내려가지 않을 것 같던 소주 도수는 2006년 2월 두산에서 20도짜리 ‘처음처럼’을 내놓으면서 다시 도수 낮추기 경쟁이 시작됐다. ‘처음처럼’은 참이슬이 기록했던 100만 상자 기록을 50일 만에 깨뜨리면서 소주시장의 절대강자인 진로를 위협했다. 참이슬도 같은 해 2월 20.1도로 낮추었지만 시장 출시 6개월 만에 19.8도 소주를 다시 선보였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부산의 대선주조와 경남의 무학이 2006년 말 각각 16.9도의 ‘씨유’와 ‘좋은데이’를 동시에 내놓으며 ‘순한 소주 전쟁’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이 싸움에서 무학이 승리하자 대선은 2009년 0.2도 낮은 16.7도짜리 ‘봄봄’을 다시 들고 나왔고, 결국 올해 16.2도까지 도수를 낮춘 ‘즐거워예’로 시장 공략 중이다. 이 과정에 진로는 2010년 말 15.5도인 ‘즐겨찾기’를 내놓아 시장 사수에 나서기도 했다.
낮은 도수의 소주는 ‘마치 물 같다’는 시장의 냉랭한 반응도 있었지만, 소주시장에 ‘젊은 여성’이라는 새로운 소비층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일부 업체는 사실상 16도가 마지막 경계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도수가 더 낮아질 경우 양조주(14~16도)와 비슷한 수준이 돼 높은 도수가 생명인 소주의 정체성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 오늘의 수다 포인트: '술인가 물인가, 애주가로서 사수해야할 도수는 몇 도?' '내가 소싯적에 아버지 몰래 35도 소주를 병으로 마셔봤는데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