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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마라톤 티켓 거머쥔 늦깎이 마라토너 박정옥씨

Los Angeles

2012.01.10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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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조금 안다고 생각했을 땐 모든 것이 우습게 느껴졌다.
생의 무게는 깃털처럼 가벼웠고 때때론 허무했다. 가식의 탈을 수없이도 갈아치웠다.
을(乙)로 산다는 것에 지쳤다.
달리다 보면 혹시 깨닫는 것이 있을까. 산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
리플레이 버튼을 수십 번 눌러 지금 또 출발점에 서있다.
다시 시작이다.


#. 4시간10분27초. 늦깎이 마라토너 박정옥(60)씨의 개인 최고 기록이다. 비 오는 날 어두컴컴한 산길을 가리지 않고 뛰었다. 엄지발톱은 벌써 4번이나 빠졌다. 깨진 무릎을 보면서 다시는 뛰지 않겠다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결심하지만 새벽 5시만 되면 어김없이 운동화끈을 고쳐맨다.

"매일 아침 눈 뜨면서 생각해요. 연습하기 싫다고. 여기저기 안 아픈 데가 없어요. 일어나기는 또 얼마나 귀찮은지(웃음)…. 그런데 1등 몇 번 해보니까 그 기쁨을 잊을 길이 없어요. 완주보단 1등이 좋아요."

숨이 턱턱 막힐 때까지 뛰었다. 매주 일요일엔 새벽 2시30분에 일어나 산을 올랐다. 평생 뜀박질이라곤 운동회날 공책 타려고 뛴 것이 전부였던 그다.

자주 만나진 못하지만 무럭무럭 잘 크고 있을 두 손자 불안한 미래에 방황하는 아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마라톤은 온몸을 던진 간절한 기도다.

"모아둔 돈도 없고 애들에게 물려줄 특출난 재주도 없어요. 그냥 정직하게 사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해요. 땀흘리는 만큼 얻을 수 있고 마음을 다해야 다른 이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제대로 전해지고 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지난 크리스마스 손자들에게 카드를 썼다. 할머니가 뛰고 있다고. 소원이 있다면 '자랑스러운' 할머니가 되는 것뿐이다. 아들에겐 혹여 부담이 될까 아무 것도 말로 하지 않았다. 깨지면서 배우는 것이 오래 남는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아픈 것 괴로운 것은 최대한 막아주고 싶다.

기도한다. 흘리는 땀방울이 그들에게 전해지기를 빈다. 인생은 쉽지 않고 고난은 늘 찾아오지만 그들이 지지않고 끝까지 버티기를 빈다. 땀은 100마디 말보다 강하다는 것을 굳게 믿는다.

#. 제법 쌀쌀한 날씨에도 반소매 반바지 차림이다. 보기에도 딱딱한 근육이 잘게 잡혀있다. 춥지 않으냐 묻자 "감기 한번 걸리지 않은 몸이에요"라며 너스레를 떤다. 목소리는 크고 말은 끊김이 없다. 활동하는 마라톤 동호회에선 알아주는 형님이라고 한다. 나이가 들수록 남성 호르몬의 분비가 많아진다며 호탕하게 웃는다.

땀흘린 만큼 얻는다는 정직함
자녀·손자에게 전해주려 시작
누군가의딸, 아내, 엄마 아닌
한 인간으로 살고 싶어 첫 도전
'희로애락' 우리 인생과 닮은 점
외롭게 달리며 하나둘 깨달아


10년 전 한 번만 같이 뛰자는 친구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시작한 마라톤. 흥미가 없으니 계속 뛸 열정도 없었다.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한두 번 뛰고나니 이건 도저히 인간이 할 만한 운동이 아닌 거에요. 한번 뛰면 3일은 꼬박 못 걸어다닐 만큼 아프고…. 단숨에 그만 뒀죠."

다시 트랙에 선 건 3년 전. 이번엔 제대로 하기로 결심했다. 아이들에게 '할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여주며 자신의 삶을 재정비하고 싶었다. 누군가의 딸 아내 어머니가 아닌 인간 '박정옥'을 살고 싶었다. 어린 나이에 결혼 직업을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그에게 마라톤은 생애 첫 도전인 셈이다.

접두어 '첫'이 붙는 모든 경험은 실패의 쓴맛을 잊게 하는 마력이 있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고 어스름한 새벽에 넘어져 갈비뼈를 다쳐도 그러했다. 아프면 약 기운을 빌려 뛰고 주말마다 차를 타고 장거리 연습하러 다녔다. 온몸엔 멍이 가실 날이 없다. "사실 하루 이틀 아픈 건 참을 만해요. 힘들지 않은 운동은 이 세상에 없으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해도 안 되나?'라는 생각이 들면 괴로워요. 하루 종일 뛰어도 1분 1초 줄이는 게 너무 어렵거든요. 그놈의 보스턴 가려고 예선 탈락만 열댓 번 한 것 같아요. 화나서 울고 운동화도 여러 번 내팽개쳤어요(웃음)."

기적이 일어난 걸까. 그는 오는 2013년 4월에 열릴 보스턴 마라톤의 티켓을 거머쥐었다. 이봉주도 인기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뛰었던 그 대회다. 아직 1년도 더 남았는데 마음은 벌써 보스턴 한가운데 있다. 꿈인지 생시인지 매일 꼬집어본다.

"요즘은 뛰는 맛이 나요. 기왕 뛰는 거 잘 뛰어야죠. 거기까지 갔는데 기록이 그대로면 억울할 것 같아요." 다짐만은 우승 감이다.



#. 마라톤은 외롭다. 심장이 터질 듯이 외롭다. 나를 제치고 뛰어가는 수많은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봐야 하고 주저앉고 싶은 두 다리를 억지로 일으켜 세워야 한다.

"외로운 운동이죠. 한시도 쉴 수 없어요. 처음엔 사람들과 웃으면서 이야기도 하는데 5마일쯤 지나면 벌써 숨이 차요. 그 다음부턴 뛴다는 행동 말고는 기억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요."

마라톤은 정직하다. 덜 주고 더 주는 것 없이 정확한 거리를 잰다. 발걸음에도 희로애락이 있고 질투가 있다.

"인생은 잘 모르겠지만 배운 것은 있어요. 너무 빨리 뛰어도 너무 천천히 뛰어도 제시간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것. 인생이나 마라톤이나 제때가 있어요."

인생이 항상 즐겁지만은 않다. 마라톤을 한다고 갑자기 겸손해지거나 행복해지진 않는다. 가끔은 젊은 20대 때로 돌아가 아이들을 다시 낳고 싶기도 하고 공부도 해보고 싶다. 대회를 앞두며 다이어트를 할 땐 왜 마라톤을 시작했는지 후회도 된다. 단순한 생활 패턴이 갑갑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래도 기록을 깰 때마다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또 깰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좋아요. 무엇보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요. 80~90살이 돼도 계속 뛰고 있을 거에요. 아마 4시간 내에 들어올 수도 있지 않겠어요?"

42.195Km 26.2마일 중 그는 자신이 20마일 지점을 돌고 있다고 말했다. 눈 앞에 종착점이 보이지만 긴장을 늦추면 안 되는 구간. 기진맥진한 상태로 꾸준히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는 오늘도 긴장한다. 좋은 할머니와 어머니의 사이 마라토너와 인간 박정옥의 사이를 꾸준히 달린다.

인생은 짧지 않다. 조바심낼 필요도 없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잘 달리는 옆 사람을 이겨보려 빨리 달려도 천천히 달려도 늦어야 5분 차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땐 늦었다. 하지만 포기하고 주저하긴 너무 이르다. 인생의 마라톤은 기권하지 않는 이상 승리한다.

구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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