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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베트남에서 온 스물한 살 작은어머니

Los Angeles

2012.01.23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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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진/소설가
지난해 봄 마흔네 살 노총각 삼촌은 스물한 살 베트남 아가씨와 결혼했다. 국제결혼을 해야 하는 처지가 안타까우면서도 국제결혼도 할 수 있는 처지가 부러웠다. 종종 삼촌은 조카인 내가 서른이 훌쩍 넘도록 결혼하지 않는 게 자신 때문은 아닐까 터무니없는 걱정을 했다. 나 역시 "결혼 언제 할 거냐"라는 어른들의 지청구에 고갯짓으로 눈짓으로 삼촌을 가리킨 적도 많았다.

어영부영 추석이 되어서야 삼촌 내외를 마주할 수 있었다. 모처럼 새 식구를 맞는 명절이라 너도나도 조금씩 들떴다. 나는 좀 신기해서 삼촌의 아름답고 어린 아내에게 다가가 영어로 말을 걸었다. 먼저 이름을 물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삼촌이 킴이라고 말을 거들었다.

이미 알면서 나이도 물어보았다. 스물 하나. 새 신부는 서툴긴 했지만 꼬박꼬박 우리말로 대답했다. 나는 어린 아이에게 말하듯 힘주어 내 나이를 말해 주었다. 나는 서어른세엣. 못 알아들을까 손가락 세 개를 거듭 펴 보이기까지 했다. 킴이 웃었다. 분홍색 잇몸이 드러날 만큼. 할머니는 딱히 누가 들으라는 것도 없이 "나는 쟤가 잘 웃어서 좋아"라며 혼잣말을 했다. 단박에 그녀와 친해지고 싶어진 나는 무릎이 맞닿을 만큼 바짝 다가앉아 말했다. 킴 나는 언니. 유 콜 미 언니.

킴이 아주 천천히 나의 말을 따라 했다. 어언니. 삼촌과 킴과 내가 키득키득 웃는 참이었다. 할머니의 손바닥이 내 등짝을 날카롭게 후려쳤다. 나는 화들짝 놀라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작은어머니한테 누가 언니라고 부르라 해쌌노." 내 딴에는 친절하게 군다고 그런 건데.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이제부턴 삼촌한테도 작은아버지라고 불러라이!" 그랬다. 스물한 살 베트남에서 건너온 잘 웃는 아가씨 킴은 서른세 살 한국 태생의 잘 따라 웃는 아가씨인 나의 작은어머니였다. 그날 나는 삼촌을 작은아버지라고 킴을 작은어머니라 부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색해서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말 거는 것도 쉽지 않아서 헤어질 때 작별인사도 겨우 했다.

요즘 곰곰이 돌이켜보면 이런 의심이 든다. "혹시 킴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에 이른바 국제결혼에 대한 불신이 숨어 있진 않았나" 하는 물음. 아니라고 말하기엔 꺼림칙했다. 게다가 나는 그녀에게 '친절한 언니'처럼 굴려고 했다. 하지만 그날 차례를 끝내고 다 같이 상에 둘러앉아 내가 본 장면은 이렇다. 킴은 고기반찬을 집어 삼촌의 입에 넣어주기도 하고 할머니의 밥그릇에 올려주기도 했다. 그 젓가락질이 하도 얌전하고 다정해서 식구들은 킴의 손에서 눈을 떼질 못했다. 누가 봐도 사랑이고 누가 봐도 우리 식구였다. 스물한 살 어린 아가씨의 첫사랑이 그녀의 젓가락질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마흔네 살 노총각의 순한 사랑도 함께 드러났다. 만약 그 둘이 싸움을 벌인다 해도 그것은 계약상의 문제가 아니라 엄연히 부부지간의 일이다. 누가 간섭하기도 뭣한 남녀 간의 이런저런 일들. 가족이니까 사소한 일들.

얼마 전에 킴의 임신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들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날 괜히 음흉한 웃음이 비죽 새어 나왔다. 신혼이라는 말이 주는 달콤한 맛을 혼자 그려보기도 했다. 또 새 식구가 생긴다는 말에 명절 기다리는 일도 이전과 달리 즐거웠다. 미리 상상하고 연습해본 결과 열두 살 어린 킴을 작은어머니라 부르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킴이 아니어도 그럴 것이다. 경우에 맞는 호칭이 은근히 낯 간지러울 때가 많다. 진심과 무관하게 그렇다. 삼촌의 아들이 커서 말을 배우면 나는 얼추 삼십대 중후반일 텐데 할머니가 그리했듯 아주 단호하게 말할 작정이다. 누나라고 불러야지. 머지않은 그때 나의 작은어머니 킴이 또 분홍색 잇몸을 환히 내보이며 웃어주면 좋겠다. 그건 어디까지나 도무지 철들지 않는 조카의 애교 섞인 어리광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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