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빳빳히 세운 머리에 한쪽만 반짝이는 귀고리 블랙 앤드 화이트 코디가 멋스럽다.
"제 눈화장은 어떤가요?"하고 조심스레 묻자 "브라운 스모키가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바깥 쪽부터 진하게 포인트를 줘야해요"라는 날카로운 조언을 해준다.
그의 메이크업 인생은 17세 방송국을 헤매던 어느 날 시작됐다. MBC 헤어팀에서 일하던 형을 찾아 갔다가 길을 잃었다. 아무 문이나 열어보자는 생각에 들어섰던 곳이 분장실이었다. 수백 가지의 아이섀도가 나란히 줄 서있고 큰 거울 앞에 눈을 감은 스타들이 가득한 곳.신세계였다.
"앞뒤 가릴 것 없이 받아달라고 부탁했죠. 청소라도 하겠다고 막무가내로 붙들고 늘어졌어요. 제가 귀여웠는지 받아주긴 했는데 2년 반 동안 정말 청소만 했어요(웃음). 붓은 한번도 만져보지 못했죠."
매주 전북 김제에서 서울까지 열차를 탔다. 편도 열차 값만 2만3000원. 돈이 드는 것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화장분 냄새 폴폴 나는 그 곳에 항상 있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다. 아이섀도에 손을 댄 건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이대로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길을 걷는가 싶었다.
"분장실 팀장님이 대학 안가면 출근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절망적이었죠. 사실 공부엔 자신이 없었거든요. 발등에 불 떨어진 듯 수능시험을 치고 전문대에 들어갔죠. 군대 가서는 상사 부인들 화장을 고쳐주면서 연습도 하고요."
그때부턴 일이 술술 풀렸다. 방송국 다닐 때 안면을 익힌 메이크업계 사람들과 당당히 재회했다.
도도메이크업.가네보.아모레 메이크업 쇼 팀장을 거쳤고 영화 특수분장에도 손을 뻗었다. 모든 이를 깜짝 놀라게 한 하리수의 첫 CF 영화 쉬리 등 수많은 스타들의 얼굴이 그의 손을 탔다. 부러울 것이 없었다. 단어 그대로 탄탄대로였다.
"22살 때 벌써 실장이에요. 당연히 건방졌죠. 눈에 보이는 게 없어요. 집도 샀고 돈은 계속 벌리고…. 잘난 맛에 살았죠. 왜 젊고 건강할 땐 정작 중요한 것은 모른 채 헤맬까요? 이게 인생인가." 모든 게 장밋빛이던 2002년 도전을 꿈꿨다. 도전은 언제나 그렇듯 실패에서 시작한다.
#. 계속되는 과거이야기에 부끄러운지 손을 가만두질 못한다.
"다 옛날이야기에요"하면서도 말을 계속 이어간다. 미국에 온 지 올해로 10년째. 10년만 잘 버티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도전이었다. 메이크업 붓 하나로 할리우드를 평정하고 싶었다. 자신이 있었다. 할 수 있다고 믿었다.
"LA에 오자마자 환상이 무참히 깨졌어요. 압구정동 명품관에서 모셔가던 제가 꼬질꼬질한 수퍼마켓 한구석에서 메이크업을 해야 하는 거죠. '거지같다'라는 게 솔직한 제 심정이었어요. 한국에 있을땐 상상도 못했죠. 자존심이 상해 무작정 길거리를 배회하며 울기도 얼마나 울었는지…."
되돌아갈까도 생각했다. 그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친구들 보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오기로 이를 악물었다. 미용재료상을 하며 할리우드를 배워나갔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메이크업 쇼에도 참가했다. 신부화장 스케줄은 빡빡해졌고 메이크업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막지 않았다.
"열심히 살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믿음은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그렇게 보면 전 축복받은 사람이죠."
사고가 없었으면 지금쯤 유명해졌을 거라고 말하자 그는 고개를 양옆으로 젓는다. 3초의 정적 끝에 입을 연다. "모든 것엔 때가 있어요."
그의 말은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는다. 옆을 나란히 걸을 때면 한 번씩 쉬어가야 보폭이 맞춰진다. 하지만 알고 있다. 이 잠깐의 불편함은 그가 느낀 기적의 증거다.
인생이 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메이크업이라고 답했다. 밝고 예쁘게 또는 어둡고 흉측하게 만들 수 있어서란다. 말 한마디 마음 씀씀이 손끝 하나가 인생의 색을 바꾼다. 남을 원망할 필요 없다. 인생이란 캔버스는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구혜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