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식당 용궁의 왕덕정(52)사장은 자신을 ‘핏줄은 중국사람이지만 사람 됨됨이는 한국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웬만한 한국사람보다 더 깊숙히 한인커뮤니티에 관련되어 있고, 한인들 행사에 더 많이 참여하면서 LA 한인타운의 유명인사가 되어있다. 한인커뮤니티의 단체 행사라면 거의 빠짐없이 기부금을 내고 헌신적으로 도와왔다.
LA와 LA 인근에 사는 한국사람이라면 거의 모두가 몇번쯤은 용궁에 발길을 들였을 것이다. 정통 한국식 중국음식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왕덕정사장은 우리들의 입맛에 맞는 정통 한국식 중국식당을 처음으로 로스앤젤레스에 열었고 이제까지 모두 여섯군데에 중국식당을 열었다.
1971년 봄, 그가 로스앤젤레스에 왔을 때 한국식 중국음식에 가까운 음식을 파는 중국식당으로 아서원과 중원루 두군데가 있었다. 한국식이라고는 하나 실상 한국에서 먹던 중국음식은 아니었고 중국식 중국음식에 더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짜장소스가 없어 미소소스로 짜장면을 만들고 있을 때였으니 짐작이 갈만하다.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한인들이 ‘정통 한국식 중국음식’을 맛볼 수 있게 된 것은 1974년에 왕덕정씨가 기린원을 열면서부터였다. 중앙일보 구사옥 건너편 올림픽 거리에 넓고 깨끗한 기린원이 문을 열자 로스앤젤레스 한인들은 ‘한국에서 먹던 중국음식’을 먹는 호사를 누리기 위해 찾아들었다. 왕덕정씨는 “기린원 음식도 재료는 미국에서 구입해 썼으니까 100% 한국식 중국음식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고 말한다.
왕덕정씨의 인생은 ‘중국음식점’과 함께 였다. 중국 산동성에서 살다 국공전쟁 때 한국으로 피란와 화교가 된 왕준문씨의 2남2녀중 막내로 한국에서 출생한 왕사장은 부친이 북창동에서 경영하던 공익루에서 자라다시피했다. 그는 서울 화교 고등학교를 나와 한양공대 기계과 3학년까지 다녔다.
반도호텔 안에 있던 차이나 에어라인에 근무하던중 직원에게 배당되는 미국 항공왕복권이 있어 미국까지 오게 됐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미국으로 와서는 도착한지 사흘 후부터 중국식당 아서원에서 일을 시작했다.
“한국에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마침 아서원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주방에서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요. 온지 며칠 되지도 않아서 취직을 했다는게 얼마나 좋았던지요. 인연이라면 인연이랄지 미국에 와서도 오자마자 일을 시작한게 바로 중국식당이었어요.”
그때 왕덕정씨가 하는 일은 아침 일찍 개스불에 밥을 하는 일, 파다듬기, 쇠고기와 돼지고기, 닭고기 썰기 등이었다. 그때는 전기밥솥이 없었기 때문에 큰솥에 밥을 제대로 하는 일도 중요한 업무였다. 하루 종일 칼질을 하고나면 손이 얼얼하고 팔이 아팠다. 아침에 깨어나면 손가락이 오무려지지 않고 감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스물세살에 시작한 미국생활은 외로움 때문에 힘이 들었다.
“피곤해서 잠자리에 들어도 곧 잠이 들지 않고 한국 생각이 얼마나 났는지 몰라요. 도마 위에 파를 올려놓고 파를 썰고 있는데 순간순간 거기에 퍼뜩 남대문이 보이고 한양대학 교정도 보이고 그래요. 그때는 로스앤젤레스가 굉장히 깨끗하고 조용한 곳이었어요. 그래서 더 외로움을 느꼈던 것 같애요. 물론 한국사람을 만나기도 힘들 때였지요.”
밥짓는 일과 재료 써는 일을 1년반쯤 하고나서 그는 웨이터로 승진했다. 가족 친지도 없이 낯선 땅에서 직장을 얻은 것만도 고마운데 웨이터로 승진을 했으니 감격스러웠다고 그는 회상한다. 붉은 유니폼도 입고 모자도 쓴 자신의 모습이 대견스러웠다.
그러나 평생 웨이터만 할 수는 없고 무엇이든 사업을 하고 싶었다. “그러자면 영주권이 필요했고 그걸 위해 흑인촌인 린우드에 파이버 글래스 몰딩공장을 차렸습니다. 3천5백달러를 투자했지요. 파이버글래스를 만들어 납품했지만 제가 뭐 아는게 있어야 제품이 제대로 만들어진건지 아닌지를 알지요. 반품은 계속 들어오고 배상하라는 클레임도 계속 들어와요. 그래도 그냥 붙들고 있었더니 8개월만에 영주권이 나오더군요. ”
그 영주권을 쥐고 시작한 것이 올림픽 거리의 ‘기린원’이었다. 1974년 봄, 두려움과 기대감으로 미국에서 첫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의 사업은 한인들을 겨냥한 한국식 중국음식이었다. 개업 초기부터 기린원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기린원이 성공한 것은 한국에서의 식당메뉴를 그대로 갖고 시작했기 때문이었어요. 첫날 제가 차이나타운에 장을 보러갔다가 식당으로 전화를 거니까 손님들이 몰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으니 빨리 들어오라고 할 정도였어요. 아래층에 120석이었고 2층은 사용할 생각을 안했기 때문에 카펫도 없고 엉망이었지만 손님들이 요청해 거기에 테이블과 의자를 빌려놓고 돌잔치나 환갑잔치 등 파티도 많이 했습니다.”
한인타운 초기 사람들은 어설프게 차려진 기린원 2층에서 친지들이 모여 먹고 마시며 즐거워했던 추억을 아름답게 기억하고 있다.
성황을 이루던 기린원을 그후 미국에 온 형에게 넘기고 왕덕정씨는 로스앤젤레스에 두번째로 한국식 중국식당을 열었다. 8가에 있던 왕궁이었다. 왕궁을 중국인에게 팔고 세번째로 연 것이 7가와 후버에 있는 소왕궁이었고, 이어 바로 옆에 사천요리 전문식당인 금정식당을 열었다.
한국식 중국음식으로 맛과 서비스에서 흔들리지 않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용궁’을 연 것은 1980년이었다. 14개월에 걸친 대규모 공사를 마친 후였다. 있는 것 다 털어 시작했지만 처음에는 생각만큼 되지가 않았다. 운도 따라주지 않았고 왕사장이 전적으로 매달리지 못한 것도 큰 원인이었다. 금정식당과 함께 경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집세가 밀릴만큼 사정이 어려워지자 처음에 동업으로 했던 사람이 손을 떼면서 왕사장 혼자 떠맡게 됐다.
“한 2년동안 영업도 안되고 고생이 많았습니다. 빚만 산더미처럼 늘어갔어요. 큰일나겠다싶어 금정식당에서 손을 떼고 다른 모든 것 제쳐놓고 제가 발벗고 나서서 용궁에만 전념했습니다. 시장보는 것에서부터 손님접대, 하다못해 손님들의 자동차 파킹까지 했습니다. 그러는 중에 경기가 좋아지면서 비즈니스가 활기를 띠기 시작하더군요.”
용궁이 궤도에 오른 후 올림픽에 소용궁을 열었다가 지금은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식당 운영 30년에 그는 ‘이제야 식당이 뭔지 알 것 같다’고 한다. 식당은 맛과 친절, 공간 등 세가지가 맞으면 성공할 수 있다고 했다.
용궁을 해오면서 그동안에 졌던 빚도 갚고 용궁건물도 구입했다. 또 옆자리 땅을 사서 별관도 늘리고 자동차가 버몬길에서 직접 파킹장으로 들여올 수 있게 확장을 하는 등 사업은 만족스러울 만큼 잘되고 있다. 객석 6백에 객실 11개가 순조로울 정도로 메워지고 있다. 고객은 한인이 80%, 왕사장은 용궁이 오늘처럼 큰 것은 전적으로 한인들 덕분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제까지 한인 커뮤니티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오면서 한인으로 살아왔다. 올림픽 한인 라이온스 클럽 회원이고 요식업 협회, 한미공화당, 한인 경찰후원회 멤버다. 또 올해에는 한양대 동창회 부회장을 맡았다.1983년 창립된 한화 연합회 초대 회장을 지낼 때에는 한인사회와 한화 커뮤니티간 친선을 다지기 위해 노력했다.
미국에 와서 살면서 그는 사업으로 큰돈을 벌어보겠다든지 공부를 많이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든지 하는 대단한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냥 어쩌다 항공권을 얻어쥐게 됐고 항공권이 있으니 이곳으로 온 것이다. 이곳에 왔으니 무언가 해서 돈을 벌어야겠기에 일을 했고 또 식당을 열게 됐다.
“이제까지 나쁜짓 안하고 남 해치지않고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순리대로 살아온 거지요. 운도 좋았고 복되게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인이면서 한국인으로 살아온 세월을 그는 만족스러워 한다.
그는 1975년 가수 캐리 조(조연수)씨와 결혼, 슬하에 조셉(22 UC 리버사이드)과 소피아(12 페이지스쿨 7학년) 남매를 두고 행콕팍에 살고있다. 캐리 조씨는 탤런트 조경환씨의 여동생으로 한국에서 가수로 활동하다 미국으로 건너와 활동을 하던중 왕덕정씨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