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혜영 기자의 '알바 스토리'] 재료따라 맛·성격 따로 '떡은 사람과 닮았다'
떡집의 하루는 새벽에 시작한다.미운 놈에게 하나 더 주려는 넉넉한 마음은 자신을 일찍 깨우는 정성까지 내보인다. 새벽 기도와 같은 느낌일까. 쌀을 빻고, 짓이기며 미운 놈을 조금이라도 좋게 보려한다. 온 힘을 다해. 옛 사람들은 아마 그랬을 것 같다.
17일 새벽 6시10분, 올림픽 떡집 창문 빈틈 사이로 하얀 불빛이 새어나온다. 창은 이미 증기 속에 파묻혀 뿌옇다. 뒷문을 열고 보니 바닥이 물에 흠뻑 젖어있다. 곳곳에 쌀을 씻은 흔적이 가득하다. 30분 전, 복장불량으로 퇴짜 맞고 집에 돌아갔다 오는 길이다. 그새 경력 15년차 과테말라 오빠(?)는 곱게 씻어둔 쌀 다섯 바구니를 빻고 있다. 금방 빻은 쌀가루는 코코넛 가루처럼 빛이 난다.
"유, 워시 핸즈 앤드 컴" 이제부터 그는 나의 선배다. 빻기 전에 쌀에 소금과 설탕으로 간을 맞춘다. 쌀알 짓누르지 말고 살랑살랑 섞으라는 말에 몇 번 키질하듯 뒤섞었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쌀알은 밑에서부터 끌어올려야 한다. 물 먹은 쌀의 무게며 살갗을 긁는 모난 알갱이가 애먹인다. 힘을 빼려 하는데도 이따금씩 내 머릿속을 휘젓는 미운 놈들이 생각난다. 정성이 부족한 탓이다.
본격적인 떡 만들기에 앞선 주문서 확인. 떡집도 꽃집과 마찬가지로 온갖 경조사와 함께한다. 태어난 지 100일 된 꼬마 아가씨를 위한 백설기부터 제사상에 올릴 절편까지 한쪽 벽에 붙은 주문서가 빽빽하다. 오늘 오전까지 만들어야 할 떡만 십여 가지. 아득하다. 멀리서 들려오는 사장님의 말소리가 빠르고 간결하다.
"시루떡 트레스 마스(Tres Mas· 세 개 더). 노노노, 절편을 먼저 해야돼. 쑥~" 한국말과 영어, 스패니쉬가 한데 섞인 외계 언어다. 체를 이용, 쌀가루를 곱게 고르던 선배도 몇 마디 거든다. "괜찮아요. 쑥 퍼스트, 무 시루떡 레이터." 괜히 따라해 보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한국말을 써보기로 했다. "오빠, 조금만 줘봐. 저기 핑크색 떡." 신기하게도 다 알아듣는다.
"유, 워터 어 리틀, 반죽 스타트." 너무 멍울지지 않게, 하지만 고루고루 섞이도록 손을 움직인다. 손은 거짓말을 못한다. 못하면 못하는 대로, 잘하면 잘하는 대로 말을 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곱게 골라낸 하얀 쌀가루는 백설기나 무시루떡, 녹두떡처럼 보송보송하고 찐득거리지 않는 떡을 만든다. 시루에 콩·팥·대추 등을 넣고 10~15분쯤 지나면 치익~하는 소리와 함께 떡이 완성된다. 사실 어려워 보이는 떡이 너무 빨리 만들어져서 깜짝 놀랐다. 보일러나 스팀기는 선배의 관할지역이라 왕초보가 뭘 알아내긴 힘들 곳. 떡 시루 위에 덮여진 하얀 명주천이 너무 뜨겁다.
손은 거짓말을 모른다
곱게 빻은 하얀 쌀가루
콩·대추 넣은 정직한 맛
떡은 우리 인생과 같다
100일 잔치용 백설기부터
제사용 떡까지 경조사 함께
어디선가 나타난 사장님은 "떡집에서 일하면서 뜨거운 것 하나 못 만지면 어떡하나. 시집 갈 수 있겠어요?"라며 뜨거운 떡을 척척 랩으로 싼다. 멀뚱멀뚱 떡 시루 옆을 기웃거리자 선배는 갓 쪄낸 약밥을 손에 조금 쥐여준다. 괜히 눈물이 날 것 같다. "맛있어요. 약밥"이라 말하자 선배는 "약밥? 약식 노?"라고 되묻는다. 떡 시루는 무겁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바닥에 떨어뜨리지 않으려 힘을 주니 목도, 어깨도 뻐근하다.
아침 식사하라는 소리에 시계를 보니 오전 8시10분. 메뉴는 우거짓국이다. 선배는 능숙하게 커피를 끓이며 "우유 넣을래?"라고 묻는다. 사장님은 "힘들지? 많이 드세요. 우거짓국이 그렇게 몸에 좋대요"라며 떡집 일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몇 숟가락 뜨다가 입맛을 잃었다. 평소 같으면 자고 있을 시간이다.
눈 밑에는 분명 다크서클이 광대뼈까지 내려왔을 텐데…. 12시까진 꼼짝없이 떡을 만들고, 식히고, 포장해야 한다. 틈틈이 쌀가루 흩어진 바닥에 물을 뿌리고, 찐득찐득 굳어진 반죽을 떼어내야 한다. 안 먹으면 너만 손해라는 선배의 말에 숟가락을 다시 잡았다.
다음은 가래떡 만들기. 거짓말이 아니라 오늘 만든 떡 중에 제일 손이 많이 갔다. 물 좀 뿌린 쌀가루는 기계에 넣고, 여러 번 다시 빻는다. 선배가 검지와 엄지를 입가에 대고 씹는 척을 하며 "씹는 맛이 생겨야 하니까"란다.
말이 된다. 가래떡의 특징은 그 쫀득쫀득하고 질긴듯한 식감이다. 무지개 떡처럼 퍽퍽 하고 잘 부스러진다면 뜨거운 불에 팔팔 끓여내는 떡국이나 떡볶이로의 변신은 불가능하다. 떡마다 떡 나름의 이유가 있다. TV에서 보는 가래떡 기계는 맨 마지막 단계다. 회사 선배의 말처럼 기계에 넣자마자 '쭉쭉' 나오진 않는다. 반죽이 모자라면 검지 두께의 실뱀 가래떡이 나오기도 한다. 두께와 묽기, 탄력 등을 따져 기계에 넣고 빼기를 반복한다.
뽑아낸 가래떡은 찬물에 식혀 같은 크기도 잘라 살짝 식힌다. 조금 남은 가래떡은 반죽과 섞어 절편으로 만든다. 기계 속 틀만 바꾸면 벨트 크기에 여러 줄이 새겨진 절편이 나온다. 신기하다. 가래떡 반죽은 버릴 것이 없다. 필요 없다고 버릴만한 것은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오전 10시10분. 어제 미리 만들어 놓은 바람떡 반죽을 기계에 넣고 넓게 편다. 기계 밀대(?)다. 4~5초면 어떤 굵은 반죽도 얇게 펴지기 때문에 손이 빠르지 않으면 동그랗게 모양을 낼 수 없다.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평평한 반죽 한가운데 녹두 새알을 3개쯤 올려놓고 반죽을 반으로 접는다. 접혀진 선 부분을 동그라미 틀을 사용, 반달 모양으로 찍어내면 완성이다.
아까 뽑아 놓은 절편을 사선으로 자른다. 한 변이 3cm인 마름모를 만든다고 생각하면 된다. 칼은 무시무시하게도 도끼와 같고 탁 탁 내려치는 소리는 나무 찍는 소리와 흡사하다. 선배가 도마에 찍힌 칼을 뽑으며 "유 원투 트라이?" 한다. 고개를 끄덕인 건 당연한 일. '그깟 떡쯤이야'하며 내리쳤다.
타이밍이 중요하기 때문에 30cm정도의 긴 절편을 5~6번 칼집을 낸다고 보면 된다. 탁 탁탁탁탁탁. 리듬은 그럴싸한데 절편 모양은 제각각이다. 한 변이 5cm인 사다리꼴 절편만 여러 개 탄생했다. 선배가 싱긋 웃으며 "바람떡이든 절편이든 실패한 건 네가 처리해"라고 말한다. 그 정도로 기가 죽을 내가 아니다.
다시 재도전. 하지만, 15년의 경력을 이길 힘이 없다. 자른 절편과 바람떡은 고소한 참기름에 바른다. 반경 1m내에 있는 모든 것들은 깨소금냄새가 난다. 좋은 향기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오전용 맞춤 떡은 모두 완성됐다. 청소도 끝났다. 생전 처음 맛본 무시루떡, 계피 맛 가득했던 약밥, 보송보송한 백설기 등 총 10가지. 새벽 시프트를 마치고 퇴근하는 선배가 왠지 쓸쓸한 눈으로 "언제 다시 일하러 올 거야?"라고 묻는다. 5~6시간 동안 옆에서 쫑알쫑알 쫓아다니는 내가 귀찮기도 했을 텐데. 처음에는 으름장을 놓던 사장님도 떡집 하나 차리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하신다.
한참을 생각했다. 떡과 사람이 닮았다는 것을. 똑같은 쌀이다. 쌀을 빻고, 재료를 넣는 것에 따라 다른 성격과 다른 매력이 나올 뿐이다. 어떤 이는 무지개 떡처럼 화려하고, 어떤 이는 가래떡처럼 진중하고 담백하다. 특별히 좋아하는 떡이 있으면, 나와는 맞지 않는 떡도 있다. 떡은 기다림의 결정체다. 빻기·찌기·자르기 등 여러 시련을 거쳐야만 쌀은 떡이 될 수 있다. 떡 하나에 물음표가 떠오른다. 나는 지금 어느 단계에 있을까? 찜통이라면 더 세게, 가루 내고 있다면 더 치열하게 갈리고 싶다.
떡으로 보는 당신
가래떡 = 밋밋하지만 담백하다. 뚝심 있는 외유내강형.
인절미 = 어디에나 어울리는 활발한 사람. 소탈하고 털털함.
무지개떡 = 화려한 매력의 소유자. 속마음은 의외로 진지하다.
백설기 = 숨김없는 솔직한 사람. 싫으면 싫다고 용기있게 말한다.
송편 = 깨가 들었는지, 콩이 들었는지 모른다. 미스테리한 사람.
팥시루떡 = 어른스러운 사람. 속이 깊다.
콩찰떡 = 끈끈한 정이 있다. 인간관계에 올인하는 스타일.
단호박떡 = 마음이 따뜻한 사람. 자상하다.
꿀떡 =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개성파. 친해지면 우린 절친!
글= 구혜영 기자
사진= 김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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