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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세인트 루이스호와 탈북자

Los Angeles

2012.03.26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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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주/버겐커뮤니티칼리지 교수
1939년 5월 13일 오후 8시. 937명의 승객을 실은 한 여객선이 독일의 함부르크 항을 떠났다. 배의 이름은 세인트 루이스호. 승객들은 히틀러 통치하의 독일을 떠나려는 유대인들이었다. 목적지는 쿠바.

5월 27일 새벽 4시. 세인트 루이스호는 곧 여명이 밝아 올 아바나에 도착했다. 그러나 승객들에겐 빛이 아닌 어두움이 찾아 들었다. 쿠바정부가 배의 부두 접안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당시 쿠바 관리들은 부패해 있었다. 쿠바는 유대인 승객들의 하선 조건으로 엄청난 액수의 현금을 요구했다. 신뢰가 결여된 협상은 진전이 없었고 세인트 루이스호는 끝내 쿠바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승객 중 한 명은 쿠바에 남을 수 있었다. 그는 칼로 손목을 긋고 배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했다. 한 독일인 승무원이 같이 뛰어 내려 그를 구한 덕에 그는 쿠바에 홀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배에 남은 가족과는 영영 헤어져야 했다.

세인트 루이스호는 선수를 북으로 돌려 마이애미로 향했다. 미국이 유대인 승객들을 받아 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프랭클린 루스벨트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이들이 보낸 호소문은 읽지도 않았다.

세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 당시도 미국은 이민 쿼터제를 운용하고 있었다. 이 제도가 깨지면 걷잡을 수 없는 난민유입이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둘째는 경제대공황. 난민들을 받아들일 경우 이들이 미국인들의 직장을 빼앗고 실업률은 더 높아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팽배해 있었다. 그러나 더 기본적으로 반유대인 정서가 작용했다.

도리 없이 세인트 루이스호는 유럽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당시 배 위에서 마이애미를 바라보던 16세의 '거다'란 이름의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그 순간을 애잔하게 묘사했다. "우린 미국의 불빛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유럽으로 향해 가면서."

거다의 가족은 벨기에에 정착하지만 곧 2차 대전이 발발하고 그녀의 부모는 '홀로코스트'의 피해자가 된다. 이렇게 나치 집단수용소로 끌려가 희생된 세인트 루이스호의 승객은 254명이나 된다.

세인트 루이스호 회항은 미국 역사 특히 인권사에 찍힌 큰 오점이다. 루스벨트는 1년 6개월 뒤 그 유명한 4개의 자유 즉 표현과 신앙 그리고 빈곤과 침략의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세계인의 보편적 권리로 명시한다. 세인트 루이스호 사건은 이런 가치와 부합되지 않았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세인트 루이스호 회항 70주년인 2009년 6월 연방 상원은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먼저 "미국과 쿠바 캐나다 정부가 이들 난민의 정치적 망명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초래된 고통을 인정한다"며 피해자들을 추모했다.

그리고 약속했다. 이 역사적 사건의 중요성을 정부 당국자와 교육자들이 앞장서 현재와 미래의 세대에게 일깨워주자고 결의했다.

세인트 루이스호의 역사적 교훈은 탈북자 문제 해결을 위한 지렛대가 될 수 있다. 미국은 중국의 가장 필수 불가결한 대화 상대이다. 또 북한의 '통미봉남'을 일정 수용하고 있다. 이런 미국이 중국정부의 탈북자 강제 북송을 간과한다면 세인트 루이스호의 아픔을 재연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미 정부당국자들에게 외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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