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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과학자의 세상보기] 단노우라 해전과 헤이케의 게

San Francisco

2012.04.17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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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옛날 얘기를 하려고한다. 과학자가 하는 옛날 얘기라 구체적인 날짜도 있다. 먼 옛날,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827년전 일본의 시모노세키 해협의 단노우라 해역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다. 1185년 4월 24일의 일이다.

일왕(日王)의 권좌를 지키려는 헤이케 (平家)가문과 이들의 라이벌 겐지(源氏) 일족이 오랜 전쟁끝에 이곳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이게 된것이다. 결과는 헤이케 가의 참담한 패배였다. 헤이케는 병력도 적었거니와 전술전략도 서툴렀다.

수많은 병사와 일족이 피살되었고 생존자들은 명예를 지키려 바다에 뛰어들었다. 6세의 일왕 안토꾸도 할머니의 품에 안겨 바다에 뛰어들었다. 헤이케 가는 이렇게 몰살되었고 역사에서 사라졌으나 43명의 궁녀들이 살아남았다. 이들은 가까운 어촌마을에 숨어들어 어부의 아내로 살아갔다.

궁녀들과 어부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손들은 매년 4월 24일이면 제사를 올려 비극적인 전쟁으로 희생된 영혼들을 달랬다. 전쟁과, 죽은 자,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는 무대극이나 전설이 되어 전해져 왔다. 전쟁이 끝난지 수세기가 지났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죽은 무사들이 유령이 되어 나타난다고 믿고있다. 특히 어부들은 패배한 헤이케의 무사들이 게가 되어 여지껏 옛 전쟁터의 바다밑을 헤메고있다고 생각한다.

헤이케의 게 (Heike Crab 혹은Heikegani)라고 불리는 단노우라 해역의 작은 게들은 사람의 얼굴, 그것도 잔뜩 인상을 찌뿌린 무사의 얼굴처럼 보이는 등껍데기를 갖고있다. 인터넷으로 헤이케 게들의 이미지를 찾아보면 더 실감날것이다. 이 게가 그물에 걸리면 어부들은 그 옛날의 비극적인 전쟁을 생각하고는 바다로 돌려보내준다.

모르고 봤다면 몰라도, 일본무사의 얼굴이라고 생각하고보면 아닌게 아니라 그럴듯하다. 바닷게의 등딱지가 으시시할 정도로 사람의 얼굴과 비슷하게 된게 과연 우연일까? 아니면 자연의 장난일까? 그것도 아니면 우리로선 이해하기 힘든 조물주의 솜씨일까?
지난 수백년간 이 바닷가에서 체계적으로 이 게의 등딱지를 연구한 사람은 물론 없었다. 하지만 과학적추론은 해볼수 있다. 원래 게 등딱지라는 물건은 다소 울퉁불퉁하게 마련이다. 그래야 근육이 그 울퉁불퉁한 곳에 붙어 힘을 쓰기 좋기 때문이다.

단노우라해전이 있기전에도 간혹 사람의 얼굴을 연상시키는 게가 있었을 것이다. 혹은 이 지역 어부들이 유달리 상상력이 풍부했는지도 모른다. 어쨓든 ‘사람얼굴게’라는 생각이 한번 들면 이 게들을 먹기가 꺼림찍했을 것이다. 특히 1185년의 처절한 전쟁이 있었던 후에는 이 바다밑바닥에서 잡혀올라오는 게들의 등딱지가 더더욱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단노우라의 전쟁이 있기 전부터도 사람의 얼굴을 닮은 게들은 그렇지 않은 게들보다 이런 저런 이유로 바다로 되돌려보내질 확률이 높았을 것이다. 행여 등딱지 모양이 패배의 고통으로 일그러진 무사를 닮았다면? 게들이야 인간의 마음속에 무슨일이 벌어지고있는지 알리 없었지만 이 바다에서는 무사의 모습을 닮으면 닮을수록 살아남아 자손을 퍼뜨릴 확률이 높았던 것이다.

많은 세대를 거치면서 인간에 의한 게의 인위선택 이 일어난 단노우라의 바다에서는 이제 무섭게 눈을 부라린 무사의 모습을 한 헤이케 게들이 나온다. 전설의 고향 분위기 나는 희안한 이야기구나 하시겠지만 실은 인간들이 해온 수많은 인위선택의 한 예에 불과하다. 가축이나 농작물이 우리의 선조들에 의해 ‘선택개량’ 되어져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변해온 것과 똑같은 원리이다.

- 글 내용에 관한 문의나, 다루어졌으면 하는 소재제안은 [email protected]으로 -


최영출 (생물공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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