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언 스퀘어] 군 복무의 의무
내가 대학을 다닐 때는 6․25 전쟁의 절정기였다. 그 당시에 우리는 대학 재학생이라는 이름으로 징집을 연장받고 학업을 계속할 수 있는 특혜를 받은 운 좋은 청년들이었다. 대학 졸업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간 나는 결혼을 하고, 대한민국의 남자로서 30세가 지난 늦은 나이에도 군복무를 필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자진 입대, 36개월의 만기 군복무를 필했다. 나는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오늘까지 부끄러움없이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 그 당시에는 군에 안 가려고 몇몇 친구들은 구청 직원에게 돈을 주며 호적의 생년월일을 고쳐 가며 나이를 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며 병역을 기피 했던 일이 비일비재했다.내가 지원 입대를 한다니까 주위의 친한 친구들은 “돌았구나” 하면서 비웃었지만 나는 그들의 멸시를 무시할 수 있는 만용(?)이 내 가슴 속에 사무처 있었다.
요즈음에는 멀쩡한 이를 빼고, 손가락을 자르고, 성한 어깨를 수술을 하며 병역을 기피한다는 매스컴의 얘기를 들으며 참으로 한탄스럽기 한량없다. 그런 사람들이 애국한다며 정치 일선에 참여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비참했던 한국동란중 우방의 젊은 미군들과 저 멀리 아프리카의 에디오피아 등 16개국의 젊은이들은 한국이라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던 낯선 이국땅에서 불과 2년반동안 3만5,000명이나 전사했고, 10만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1961년 8월 한참 뜨거웠던 여름, 집 주소가 종로구라서 종로 구청앞에 도착 하니 트럭 몇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종로 구청 문 앞에 나와 우리들을 환송하던 구청장이 트럭 위에 서있는 나를 알아보고 위에서 내리게 한후 운전사 옆자리 앉게 하고 문을 닫으며 “잘 다녀오세요” 인사를 한다. 특별석에 앉아 귀빈 대접(?)을 받으며 서울역에 도착해 객차에 몸을 실었다.
논산 훈련소에 도착해 긴 줄에 서서 기다리다가 드디어 대한민국 육군의 사병 생활이 시작되는 증표인 군번(#1088 8980)을 받고 내무반에 들어가 미군들이 쓰던 낡은 작업복과 군화를 지급받았다. 자기 몸과 발에 맞추어 지급 되는 요즈음의 훈련소가 아니다. 지급하며 하는 선임 하사의 말 “몸과 발을 군복과 군화에 맞추라”는 신기한 명령이다. 요령은 한가지. 입소자들이 서로 마주보며 나와 비슷한 사이즈의 옷과 구두를 받은 훈련병을 찾아내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이다.
세탁은 일주일에 한번, 세탁물을 들고 강가로 가서 몸도 씻고 빨래도 하고.
하루에 파리를 열마리씩 잡아서 밤 점호 시간에 바쳐야 하고, 쥐가 북적거리는 내무반이라 쥐를 잡아 바치라는 명령에 파리와 쥐는 순식간에 멸종돼 버리기도 했다.
몇일전 한국 TV를 통해 부모들이 자가용으로 아들들을 데리고 논산 훈련소까지 가서 입소식에 참석하고, 입소식이 끝나서는 아들이 무슨 죽음의 소굴이나 외국의 치열한 전쟁터로 나가는 양 울음을 터트리며 껴안고 발을 떼어 놓지 못하고 서글퍼하는 모습을 보며 한숨이 나왔다. 다 자란 장년을 남자답게 독립시키는 절호의 기회를 나약하게 만드는 부모들의 태도가 안타까웠다.
반면, 미국에 유학중이던 일란성 쌍둥이 한국인 형제가 이스라엘 학생들이 학업을 중단, 고국으로 가 군에서 복무를 한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 동생이 형을 선도해 고국으로 돌아와 해병대에 자진 입대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형제가 북괴군이 포격을 가한 연평도 부근의 아주 작은 섬, 그것도 북에서 포격을 가하면 사정권에 든다는 최전방에서 용감하게 근무하는 모습을 보며 요즘 젊은 세대들의 귀감이 됐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한국의 군복무 의무 연한은 고작 24개월, 이북 군인의 복무 기간 11년과 비교해 보면 정말로 감사해야 할 일이 아닐까? 애국심은 없다고 한들 헌법에 명시된 군 복무의 의무는 최소한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성실하게 임하는 청년들이 되기를 두손 모아 빌어본다.
박종영 (한인 신용 조합 이사장)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