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만큼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영향을 끼친 나라도 없건만 고작 생각나는 게 보드카뿐이다. 설마 그 큰 나라에 맛있는 요리 하나쯤 없을까. 금요일 오후 찾아간 올드 패서디나의 록소라나(Roxolana). 정확히 말하자면 우크라이나 레스토랑이지만 러시아계 지인의 말에 따르면 러시아에서도 흔히 먹는 요리다. 맛없으면 책임지라는 으름장과 함께 문을 열었다.
오렌지 불빛 아래 금요일 밤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와인바를 겸하고 있어 약간 어둡고 아늑한 분위기. 평소 같으면 메뉴부터 허둥댈 텐데 오늘은 든든한 지원군 덕에 한시름 놓았다. '-스키' '-야브냐챠'가 이어지는 노랫말과 올드 패서디나만의 고요함이 잘 어울린다.
처음으로 나온 요리는 보르지(Borsch). 비트(Beet)를 갈아 만든 수프라 색이 유난히도 빨갛다. 양파.당근.양배추.감자 등이 단 맛을 낸다. 비트라는 채소는 처음 맛보지만 전혀 위화감이 없다. 국물 한 수저 뜨다 보니 두 숟가락이 되고 결국 두 그릇을 혼자 비웠다. 맛있다. 깔끔하고 맑은 '무국' 같은 맛. 고기는 들어있지 않지만 달콤하고 편안한 맛이 포만감을 준다. 빵을 한입 크기로 떼어넣고 한 입. 질척이지 않는 국물이라 더욱 좋았다.
보르지와 함께 곁들인 삐로기(Pierogi)는 양배추나 고기로 채운 파이. 파이라곤 하지만 찐빵에 더욱 가깝다. 대신 재료를 감싼 빵이 조금 두껍다. 반으로 갈라보니 간 고기만 가득하다. 거기에 올리브유와 사워크림을 발라 한 입 베어 무니 짠맛이 쭉 올라온다. 빵도 두꺼운데 고기 층도 두꺼워 목이 멘다. 양배추만 들어있는 삐로긴 딱 야채 호빵 맛. 시큼하고 기름진 사워크림이 풀죽은 양배추와 잘 어울린다.
사워크림과 올리브유의 이중공격에 상큼함이 필요할 때쯤 올리브예(Olivier)가 나왔다.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검은 올리브가 가득 올려진 감자샐러드다. "이거 생일이나 명절에만 먹을 수 있는 거야"하며 호들갑떠는 친구에 반해 생김새는 딱 으깨지 않은 감자샐러드와 흡사했다. 새우.연어알.고기 등이 올려져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다지 새롭진 않다. 사실 살짝 놀랐다. 샐러드라 해서 한 주먹 정도일 거라 생각했는데 3~4명이 족히 두 스쿱정도 먹을 수 있는 양이다. 맛은 의외로 상큼하다. 당근과 올리브가 아삭함과 단 맛을 잘 잡아줘서 감자의 퍽퍽한 맛이 강조되진 않는다. 닭.쇠고기는 손톱 크기로 얇게 저며져 무겁지 않다. 단 연어알과 새우는 얼마 들어있지 않다.
아직 메인 요리는 시작도 안 했는데 배가 불러온다. 러시아 사람들이 괜히 건장한 게 아니었다. 숨 돌리기 전에 다음 요리 등장. "이거 진짜 한국 만두랑 똑같이 생기지 않았니?" 그렇다. 바레니키(Vareniki)는 그레이비에 졸인 듯한 쫀득쫀득한 감자 만두다. 송편 같다. 달착지근하고 포근한 담백한 맛. 와작 씹으면 쏟아져 내리는 감자 속살이 부드럽다. 여기에 사워크림을 곁들여 한 입. 처음 한 개를 먹고나선 "어? 맛있어" 했는데 그 후엔 칼로리가 조금 걱정된다. 한 2~3개 먹으면 배가 부를 정도. 이쯤 되면 궁금하다. 감자와 사워크림이 들어가지 않은 요린 없는 걸까. "그 추운 나라에 무슨 재료가 풍부하겠어? 감자 몇 알에 감사하는 거지(웃음). 내가 보기에도 마요네즈와 사워크림 없이는 요리가 안 되는 것 같긴 해. 예전엔 토마토가 별로 없어서 케첩도 못 만들었대." 러시아=감자다.
메인 요리인 치킨 타바카(Chicken Tabaka)와 코틀렛(Kotlet)은 함께 나왔다. 매시포테이토도 함께다. 배를 갈라 양옆으로 쫙 벌려 구워낸 닭고기는 우리네 전기구이 통닭과 비슷하지만 좀 더 기름진 맛이다. 소금.후추로 간을 해 담백한 살코기 바삭한 껍질 그레이비에 촉촉이 젖은 날개. 영계인지 크기가 매우 작았지만 살이 보드랍고 고소했다. 버터 향이 진하게 풍겨 맛을 더욱 살린다. '홈메이드' 코틀렛은 말 그대로 패티였다. 색다른 것도 없고 맛도 딱 그정도다. 아직 핑크빛이 도는 패티에 별다른 소스도 없다. 볶은 피망과 당근을 곁들여 먹는다. 덜고 말 것도 없이 '아~ 고기 완자구나'하고 끝났다.
8시가 넘었는데도 아직 어스름한 빛이 남아있다. 처음 맛 본 러시아의 맛은 놀랍도록 한국과 닮아있었다. 그들의 딱딱 끊어지는 말투처럼 멋 내지 않고 깔끔한 끝 맛이 마음에 쏙 들었다. 알 수 없는 소스나 향신료를 쓰지 않아 본연의 향과 맛이 그대로였다. 특히 보르지란 수프는 지금껏 찾아다닌 이색요리 중 TOP 3에 들 만큼 맛있었다. 감자-사워크림의 조합은 자칫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부드럽고 포근하다. 맛과 분위기에 한껏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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