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우리는 언제나 불안했다. 그래서 누군가는 현대 사회를 '불안의 시대'라 부른 것일지도 모른다. 불안의 징후는 이미 우리의 일상을 잠식했다.
손톱을 깨물고 다리를 떨고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잠시 혼자 있는 시간을 참지 못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침대에 누워 잠이 들만 하다가도 갑자기 소스라치게 경기를 하며 눈을 뜨기도 한다.
불면증도 흔해졌다. 자려 해도 머릿속에 잡생각이 떠나지 않아 쉬이 잠들지 못하는 증상이다. 불안장애도 유행이 됐다.
특히 '공황장애를 앓았다'는 연예인들의 고백이 줄을 이으며 일순간 극심하게 밀려드는 극도의 불안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도 증명됐다. 최근 들어서는 청소년들의 불안장애도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특히나 불안한 심리가 반복적 강박행동으로 나타나며 약물이나 심리 치료를 받는 중고등학생들의 수가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은 다소 충격적이기도 하다.
불안이 무서운 것은 '모호함' 때문이다. 비슷한 감정인 공포는 뚜렷한 실체와 대상이 있을 때 느끼게 되는 감정이다.
그래서 그 공포의 원인을 없애거나 거기서부터 회피하는 것도 쉽다. 반면 불안은 실체가 없다. 그래서 처치 곤란인 경우도 많다. 게다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그 불안의 강도나 주관적으로 인지하는 심각성도 쓸데없이 눈덩이 불어나듯 커진다.
현대인들의 불안 증폭도 그 불확실성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특히 한국인들은 아주 어릴 적부터 불확실한 환경에서 명확한 성과를 거둬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교육제도와 입시요강이 수시로 변하는 환경에서 발 빠르게 적응해 좋은 성적을 거둬야 하고 취업대란 속에서 일자리라도 얻어야 한다.
널 뛰는 경제상황은 이후에도 승진과 결혼 주택마련의 가능성을 불투명하게 하고 정리해고나 사업부도에 대한 불안감에도 끝없이 시달리게 된다. 사람들은 잡히지 않는 것을 향해 허우적대야 하고 발버둥쳐야 한다. 손에 넣어야 하는 것을 얻지 못할까 노심초사할 수 밖에 없고 통제할 수 없는 환경을 어쩌지 못해 자나깨나 그 고민에 목을 맬 수 밖에 없다.
물론 명확한 원인이 있는 불안도 있다. 심각한 자연재해나 사고를 당했을 경우 정신적인 트라우마가 생겼을 경우엔 아주 미세한 자극에도 비합리적인 불안상태에 빠지는 경우도 많다. 신체적인 원인도 무시 못한다. 불안이나 우울 등의 정서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뇌신경 내의 신경전달물질의 부족 혹은 과다가 병적인 불안을 일으키기도 한다.
일부 전문가들은 불안을 아주 '까다로운 심리 반응'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적절한 불안은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라 완전히 없애는 것도 불가능하고 상담이나 치료를 통해 불안 정도를 감소화한다 해도 재발이 잘 되고 경과도 만성화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게다가 불안 장애는 흔히 우울증이나 알코올 중독 같은 의존 장애로까지 발전할 확률도 높다.
예방도 어렵다. 원인도 복합적이고 불확실한데다 불안장애에 대한 주변사람들의 인식 또한 '꾀병'이나 '의지박약'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아서다.
물론 불안감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약간의 불안감을 스스로 병적인 증세라 치부할 필요도 없다. 적절한 불안감은 "인간을 발전시키는 동력이 되는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도 말한 바 있다.
특히 이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불확실성을 보다 실체적이고 통제 가능한 확실성의 영역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인간의 의지는 오히려 건강하다고까지 표현할 수 있으리라.
역사 속 수많은 천재도 끝없는 불안 속에서 살아왔다고 전해진다. 괴테 브레히트 베게트 카프카 스타인벡 같은 유명 작가들이 그랬고 뭉크와 같은 화가 프로이트와 같은 정신분석학자 또한 불안 장애를 앓아 왔다고 한다.
그들에게 불안은 오히려 성장과 성공의 동력이었는지도 모른다.
'불안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일부다' 라고 표현한 보르빈 반델로브의 저서 '불안 그 두 얼굴의 심리학' 속 한 구절은 그래서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더 큰 울림을 던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