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인생] 연극배우 방향씨
깜깜한 어둠속에서
비로소 연기가 보였다
'레디 액션'하고 기다려주지도 않는다. 대사를 통째로 잊어버려도 계획 없는 애드립에 맞춰 웃고 운다. 인생은 무대 위에 올라가 마음대로 포기할 수도 우길 수도 없는 한 편의 연극 같다.
#. 모놀로그
"제 목소리가 좀 크죠? 마이크도 절 못 견뎌요." 사방이 쩌렁쩌렁 울린다. 방향(38)씨를 보는 내내 관객석에 앉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상황도 흐름도 급변한다. 금방이라도 울거나 웃고 화낼 것 같다. 팔색조 같은 마스크다.
"보통 가해자에 어울리는 얼굴이죠(웃음). 다중인격이나 정신분열증 환자를 연기하면 재밌을 것 같아요. 주로 맡는 역은 억척스런 아줌마나 미혼모…. 얼굴 때문에 센 캐릭터들이 많이 들어와요. 그렇다고 해서 멜로를 포기한 건 아니에요. 멜로 싫어하는 여배운 없잖아요?"
낯을 가린다는 자기소개와는 달리 어색함을 없애려는 데 전력을 다한다. 예명 같은 본명부터 애늙은이가 될 수밖에 없었던 어린 시절 한 줄짜리 로미오 친구 배역까지 방씨는 유머를 적절히 섞어가며 다가온다. 대화가 이어질수록 자잘한 미소를 흩뿌리다가 갑자기 이 유쾌함이 연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는 배우가 아닌가. 싫어도 좋은 것처럼 웃을 수도 있을 거다.
"그런 오해 많이 받는데…. 비즈니스용 미소는 못 지어요. 여러 가지 감정에 부딪히다 보니 자신의 감정에 더욱 솔직해질 뿐이죠. 연기를 볼 때도 감정의 진정성을 보잖아요? 천상배우는 사회생활 못하죠." "그럼 배우생활은요?" 하고 묻자 5초간의 정적이 흐른다. "냉정하죠. 뜨겁기도 하고."
무대는 야누스다. 서열과 관계없이 무대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일순간에 기회를 잃기도 한다. 섣불리 아는 척할 만큼의 간접경험은 있지만 무대 한두 번 서고 같잖은 '배우병'을 부리기엔 관객이 너무 똑똑하다. 성취와 자괴감 사이를 외줄 타는 느낌. 그에게 무대는 늘 돌아오게 되는 곳이다.
"연극을 하는 친구들끼리 곧잘 하는 말인데 무대는 마약이에요. 힘들어 떠났다가도 금단현상 때문에 안 하면 죽을 것 같은 그런 것. 연극은 가난해요. 열심히 해도 아직 전 무명이고요. 그래도 멈출 수 없어요." 그의 독백은 고백이다. "전 배우에요. 배우는 무대 위에 있어야 배우죠."
#. 암전
고생했던 일들을 웃으며 털어놓는다. 덩달아 웃어야 하는 건지 정색을 지켜야 하는 건지 헷갈린다. 고등학교 졸업 후 26살 늦깎이 대학생이 될 때까지 밤새 만두피를 빚고 옷을 팔며 가죽도매상 재고리스트를 외우는 삶.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질척한 욕지거리와 소박한 행복이 뒤섞여 있는 동대문 한쪽 모퉁이에서 그는 연기를 배웠다. "욕도 계속 먹다 보면 환청이 들리거든요. 그때 배운 얇은 만두피와 거친 입은 평생 제 거에요. 집안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고 부모님께 연기한다고 말하기가 왠지 미안해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지금은 다행이었다고 생각해요. 변태 소년가장 욕쟁이…. 그렇게 살아있는 캐릭터 어디에서 또 보겠어요?"
군데군데 깨지고 거칠다. 남의 손톱 예쁘게 다듬느라 전혀 꾸미지 않은 그의 손이 눈에 확 들어온다. 보통 배우라 하면 꾸미는 것에 익숙할 것 같은데 방씨는 그런 것엔 관심이 없어보인다. 반전. "2004년 LA엔 돈 때문에 왔어요. 해도 해도 안 돼서. 연기 안 할 거면 돈이라도 많이 벌고 싶어서요." 대학생 풋내나는 연기도 시원치 않은 성극도 모두 못마땅했다. 악착같이 등록금 벌어 배우고 싶던 연기를 내팽개쳤다. 열망이 컸던 만큼 포기도 빨랐다. 막막한 기다림을 묻고 또 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리고 예쁜 애들 많아서 지레 포기했던 것 같아요(웃음). 연극을 한다고 하면 이상하게 바라보는 주위 시선도 싫었고요. 답답해서 한 2년 쉬었는데 결국 다시 하네요. 캐릭터는 매일 바뀌고 잘 안 풀릴 때가 더 많지만 안 하면 근질거려서요."
LA에도 무대는 있었다. 퇴근 후 연습실이 있는 클레어몬트행 막차를 놓치지 않으려 매일 뛰고 연극 한 편을 위해 3개월 동안 새벽 1시에 귀가하는 삶이 마냥 감사했다. 암전이 남긴 상흔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한번 사그라진 열정을 일으키는 것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두려움 후회…. 그래도 연기를 택했다. "했던 가닥은 버리라는 충고를 받은 적 있어요. 열심히 하지 말고 재밌게 하라고. 요즘은 가끔 무대에서 재미없으면 나가라는 경고(?)도 하는데 다행히 아직 자리를 뜬 분은 없어요(웃음). 즐거워요. 지금 아주 많이."
#. 방백
자신을 어떤 배우라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냥 배우'란 답이 돌아왔다. 군더더기도 없지만 재미(?)도 없다. 장르나 스타일에 상관없이 모든 역할을 방향화시켰다는 것. 연기를 통해 다른 인생보단 나만의 색깔을 찾아간다. 배우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겸손과 열정이란다. 맞는 말이긴 한데 어딘가 심심한 맛이 난다. 한참 앞만 보던 방씨가 손뼉을 치며 뭔가 생각났다는 신호를 보낸다. "할리우드 오디션을 보러 갔는데 다짜고짜 '미스 방 당신 연기 잘합니까?' 하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했는데 바로 탈락했죠. 이제 연기 시작한 스무 살 어린애들은 척척 붙고. 나중에 물어보니 최선은 답이 아니래요. 프로는 잘하느냐 못하냐 둘 중 하나라고. 결국 자신감을 보는 거죠." 대답을 바꾸는 데만 8년 걸렸다며 그가 활짝 웃는다. 이젠 당당히 YES라 외친다.
10여 년간 오른 수많은 무대와 영화 두 편. 연극 '빈방 있습니까?'의 덕순이를 연기하며 치유를 얻었고 2009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된 '마이룸'에선 소통을 배웠다. 기억나는 대사가 있으면 한번 읊어달라고 하자 그는 "정말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라며 진땀을 쏟는다. 분위기 냄새 관객의 표정 제때 무대에 오르지 못했던 일까지 생생한데 대사만 사라졌다고 했다. 추억이란 단어를 내뱉는 방씨의 눈이 촉촉하다.
"10살 때 혼자 오디션을 보러간 적이 있어요. 부모님 모르게. 그때 심사위원이셨던 남능미 선생님이 '넌 꼭 연기를 할거야'라고 하셨는데…. 아마 평생 할 것 같아요. 다시 시작하길 정말 잘했어요. 그만뒀어도 언젠가 다시 돌아왔겠지만 그게 60 70대가 아니라 지금이라서 감사해요. 돌아가신 아버지도 아마 대견하다 하실 거에요.(연기는 뭐냐는 질문에) 연기는 방향이죠."
열정은 지금 당장 달려가고 싶은 그 방향이다.
글= 구혜영 기자
사진 = 김상진 기자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