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왜?'라는 생각이 든단다. 순전히 '운'인 것 같단다. 할리우드의 상징물인 그루먼 차이니스 극장 앞에 손도장까지 찍은 배우의 겸손이 이 정도다. '진짜 열심히 잘해야겠다'면서도 '뭘 어떻게 열심히 해야 하나' 고민도 한단다. 띄엄띄엄 진중하게 자신의 생각을 이어가는 말투 속에서 많은 생각과 고민의 흔적도 읽힌다. 한국과 아시아를 넘어 할리우드에서까지 점점 존재감을 넓혀가고 있는 이병헌은 그런 배우였다. 최근 아시아배우 최초로 할리우드 길에 핸드프린트를 남긴 이병헌을 만나 그의 연기철학과 앞으로의 계획을 들어봤다.
- 배우로서 큰 영예를 안았다.
"기분이 참 묘하다. 과하게 평가받는다는 느낌 아직 섣부른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원래 성격이 좀 그렇다. 출연한 영화평도 너무 좋게 나오면 마음이 불안하고 오히려 냉정하게 나오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기대보다 별로네' 보다는 '생각보다 괜찮네'가 좋다. 자연히 책임감도 커진다. 지난 20년도 나름 잘 해온 것 같지만 앞으로 20년을 더 잘해야겠단 생각이다."
- 이병헌이란 배우의 경쟁력은 뭘까.
"역시 운이 제일 컸던 것 같다. 미국 진출은 특히 그랬다. 할리우드는 완전히 딴 사람들 얘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나보다 영어 잘하고 연기 잘하는 배우도 얼마든지 있다. 그 사람들한테는 왜 이런 기회가 오지 않았겠나. 순전히 내게 운이 따라줬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작품이든 열심히 하려는 마음은 있다. 하지만 배우 일이라는 게 감정을 무기로 하는 것이다 보니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기도 하다. 미술가가 영감이 안 떠오르는데 열심히만 한다고 훌륭한 그림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 않나. 마찬가지다. 과연 배우가 열심히 할 수 있는 게 뭘까 고민도 된다. 가만 보면 열심히 안 하는 배우도 없다. 요새 한국 배우들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쉬지를 않는다. 괜히 나만 쉬엄쉬엄 일하나 싶어 마음도 급해진다."
- 처음 할리우드 도전 결정도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당시 트란 안 홍 감독님의 '나는 비와 함께 간다(I Come with the Rain)'와 김지운 감독님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거기다 '지.아이.조(G.I.Joe)'까지 한꺼번에 들어와 이걸 셋 다 해야 하나 안해야 하나 고민이 정말 많았다. 그때 하도 고민을 하다 보니 영화를 선택하고 일을 하는 데 대한 나만의 방식이 180도 바뀐 것 같다. 생각을 하다하다 '인생 뭐 있어. 에이 그냥 다 해봐'싶은 생각이 들더라. 이전까지는 너무 두들기기만 하고 건넜다면 그때부터 걷다 빠져도 다시 나오면 된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인생이 그리 길지 않더라. 어차피 보여지는 직업 기왕이면 자신감을 갖고 본고장에서 한번 해 봐야겠다고 결심했었다. "
- 한국배우는 한국어로 한국영화에서 연기할 때 최고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생각하는 배우들도 많다.
"처음엔 나도 그런 쪽에 가까웠다. 송강호 선배만 해도 그렇다. 영화도 해외 시장에서 많이 알려져있고 연기력이야 이미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으신 분이지만 한국에서 연기하는게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이라며 한국 영화계에 남아 계신다. 이런 의견도 아주 존중한다. 나 역시 아무리 유명한 감독의 할리우드 영화라도 아프리카 추장 역할을 해야 하거나 미국의 역사나 정서가 들어가 있는 시대극이 들어왔다면 아마 못했을 것이다."
- 그래도 '지.아이.조'에서 연기한 스톰 셰도우는 낯선 모습이었다.
"진짜 오랜 시간 고민하고 결정한 것인데도 처음 의상 피팅 갔던 날 거울을 딱 보고 심각하게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겠다' 싶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새하얀 옷에 얼굴은 마스크로 가리고 등에 칼까지 두개 찬 채 기구를 타고 날아다녀야 하니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그래서 감독과 프로듀서를 만나 빌면서 '정말 죄송하다. 잘못 생각한 것 같다'고 까지 했다. 그날 밤 잠을 설치면서 생각한 끝에 내 선택에 책임을 져야겠다 마음 먹었다. 아무리 만화 같아도 이 안에서 내 것을 잘해내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운 좋게 그 모습을 보고 제작진이 '제법 괜찮네 2탄도 하자' 해줬던 것 같다."
- '지.아이.조2'까지 찍었다. 이젠 할리우드에 적응이 좀 되나.
"아직도 어색하고 낯설다.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 첫 리딩때다. 다들 잘하는데 '쟤 혼자 왜 학예회를 하고 있나' 생각할까봐 긴장이 많이 된다. 아직도 영어는 꾸역꾸역 짜내는 수준이다. 로케이션에서 오는 외로움도 크다. 미국은 정말 다양한 모습이 있는 땅이더라. 이번에 촬영한 뉴올리언스의 숙소는 시내에서 30분이나 떨어져 벌판에 덜렁 서 있는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할 일 없이 발코니에 의자 놓고 멍하니 앉아 있는 게 일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날씨 좋은 날 밖에 하루종일 앉아있는 심정이 이해가 됐다."
- '지.아이.조2' 의 개봉이 늦춰졌다.
"아쉽긴 하지만 3D로 변환돼 나오면 더 재미있고 멋진 영화로 완성될 것이라 확신한다. 팬들도 그렇게 믿고 기다려주시리라 믿는다."
- 또 다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레드2(RED 2)'의 출연도 확정됐다.
"며칠 전 최종 캐스팅 소식을 들었다. 브루스 윌리스 캐서린 제타존스 존 말코비치 헬렌 미렌 앤서니 홉킨스까지 함께하게 됐다. 그 사이에서 뭘 할 수 있을지조차 모르겠다. 커피 심부름이나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내 배역은 강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역할이지만 상황이 나를 웃기게 만드는 코믹한 캐릭터다. 9월부터 캐나다와 영국에서 본격적 촬영에 들어갈 듯 하다. 코미디지만 세련된 영화다. 이렇게 훌륭한 배우들이 모이는 데는 다 이유가 있지 않겠나. 돈 주고도 배울 수 없는 연기 수업이라 생각하고 성실히 임하고 싶다."
- 어떤 배우로 남고 싶나.
"언제나 고민되는 질문인데 최근에야 대답을 찾은 것 같다. 10년 20년이 지나도 지금처럼 많은 작품들 속에서 내가 영화를 선택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 또 하나 만일 할리우드를 꿈꾸는 다른 후배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가장 좋은 길 가장 바른 길을 조언해줄 수 있는 위치가 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