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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꽃미남' 투수 문희수의 짧았던 투수인생 ②

Washington DC

2012.07.12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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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에 야구하는 동네 형들이나 좋아하는 선수가 입고 있는 유니폼이 멋있어서 야구를 시작했다는 선수들이 열에 일곱은 될 것이다. 문희수 투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초등학교 시절 아시아야구선수권 대회 출전 팀이었던 필리핀 대표 팀의 흰색 바탕에 소매만 파란 유니폼 색깔이 무척 멋있어 보였는데 바로 자기가 다니던 서석초등학교 유니폼 색깔과 똑같았던 것이다.

 그래서 감독에게 졸라서 야구부에 들어간 것이 문희수가 평생 야구인으로 살아가게 된 계기이다. 초등학교 때도 작은 체구였는데 어깨가 좋아서 투수가 아닌 포수로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중학교로 진학해서는 역시 투수가 아닌 유격수로 뛰다가 천안북일고가 광주로 동계훈련을 왔는데 그때 조창수 감독에게 김영덕 북일고 감독이 “투수를 시켜 보는 게 어떠냐”고 한 말이 그가 투수의 길로 들어서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
 
마침 2학년 선배 중에 투수가 없는 바람에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뛰게 되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 당시 고교 야구는 군웅할거(群雄割據) 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쟁쟁한 팀들이 전국에 즐비했었다. 그러한 상항에서 전국무대에 데뷔하자마자 청룡기 대회 4강 대열에 오르면서 고교야구 팬들에게 자신을 뚜렷이 각인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지역예선에서는 광주상고와의 경기에서 노히트노런 경기 기록까지 세우면서 정말로 선동렬의 뒤를 이을 유망주로 기대를 한 몸에 받기 시작했다.
 
이렇게 기고만장해 있던 때 조창수 감독이 해태로 자리를 옮기고 OB 베어스에서 강타자로 활약하던 김대권 선수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이런 선수들의 자만심을 혹독한 훈련으로 꺾어 버리면서 광주일고를 전국 3관왕으로 등극시키는 위업을 달성하게 한다.
 
문희수는 그 때를 회상하면서 “감독님은 애들이 아주 붕 떠 있다고 생각하고 그해 동계훈련을 하는데 광주 시내를 뛰게 하면서 유람을 시켰다. 그리고 조선대학교에 계단이 엄청난데 거기를 매일 오르락내리락하게 했다.
 
감독님은 옆에서 자전거를 타고 딱 붙어서 따라다니셨고. 서울 분이라서 부드러운 서울 말씨가 귀에는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리는데 입에서는 거친 숨소리만 나왔다. 그런 훈련이 있었기에 고교 3학년 때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고 본다.” 그에게 또 한 사람의 고마운 스승이 있다면 ‘국민감독’ 김인식 감독이다.
 
문희수가 대학진학을 포기한 이유가 학교에서 동국대로 진학할 것을 강요했기 때문이었는데 그가 입단하자 동국대 감독인 김인식 감독이 투수코치로 부임한 것이었다. 김 감독을 볼 면목이 없었다. “이제 죽었구나!” 하고 불이익을 당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김인식 감독은 괘씸하게 생각지 않고 오히려 다른 선수들보다 더 잘 해주면서 기회를 많이 주셨던 통이 정말로 크신 은사였다고 김인식 감독에게 존경을 표했다.
 
문희수의 별명이 ‘꽃돼지’다. 같은 동네 살면서 오빠 동생으로 지내던 양궁 올림픽금메달리스트 서향순의 별명인데 문희수가 체중이 갑자기 불어나면서 붙여진 별명이다. 서향순은 그 별명으로 금메달리스트가 됐지만 문희수는 그 별명을 얻은 후부터 무릎부상으로 사향 길을 걷게 되는 아픈 추억이 담긴 별명이다.
 
그가 지금같이 현대 스포츠 의학의 혜택을 받는 시대에 활약했다면 선동렬도 인정했던 그의 투구를 오래도록 지켜봤을텐데 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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