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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 사망 39년] 아뵤호~ call me Bruce

Los Angeles

2012.07.19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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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름 끼치는 날카로운 고양이 소리
엄지 손가락으로 코를 튕기는 여유
가만히 있다가 터져 나오는 스피드
잔뜩 지푸린 눈매, 독사 카리스마
미국 출생…명문 워싱턴대 입학
깡패 출신 문제아에서 돌연 의문사


서른둘의 나이에 전설이 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에겐 전설이 되기 위한 요소들이 충분했다. 그림처럼 조각된 근육 혀를 내두르게 하는 무술 신공 상대방을 단번에 제압해버리는 눈빛 스크린을 완벽히 장악하는 연기력과 그에 따른 어마어마한 흥행 성적 그리고 의문투성이의 갑작스런 죽음까지.

그리하여 전설은 더욱 신비와 위엄을 갖는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에 그는 더욱 많이 반복 소비되고 연구되고 신격화됐다. 이소룡. 그가 세상을 떠난 게 오늘로 39년이 됐다. 그 세월은 이소룡의 트레이드마크였던 노란색 운동복과 '아뵤~' 소리를 내던 영화 속 장면을 단골 코믹 패러디 거리로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의 모든 남자들에게 그는 전설이며 영웅이며 로망이다.

이소룡은 194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용의 해 용의 시였다. 때문에 중국인들은 이소룡이 용의 기운을 타고난 영웅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의 아버지는 경극 배우였다. 그를 낳았던 때도 미국 순회 공연 중이었다고 전해진다. 아버지의 공연이 끝나고 생후 3개월 만에 홍콩으로 돌아간 이소룡은 병약하고 왜소했던 아이였지만 아버지를 따라 여러 작품에 곧잘 아역배우로 출연하며 자연스레 영화계와 연을 다졌다.

청소년 시절 이소룡은 '싸움꾼' 이었다. 친구들과도 다툼이 잦았고 경찰에 연행되는 일도 빈번했다. 13살 나이에 처음 무술에 입문하게 됐던 계기도 싸움이다. 동급생과의 싸움에서 크게 패한 그는 당대 무술 고수였던 엽문을 찾아가 영춘권을 사사한다. 영춘권은 훗날 이소룡 무술의 근간이 됐고 이후 그는 공력권 홍가권 권투 등을 섭렵하며 이를 통합해 절권도를 정립한 바 있다.

무술을 배우며 싸움이 더욱 잦아지자 이소룡의 부모는 아예 아들을 미국으로 보내버린다. 미국 시민권자였던 이소룡은 부모님을 떠나 혼자 시애틀로 건너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명문 워싱턴 주립대(University of Washington)에까지 입학한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로 쿵푸 교습을 시작한다. 그가 가르치는 쿵푸는 형식적이지 않고 실용적이면서도 역동적이란 소문이 퍼지며 금세 인기몰이를 했고 이소룡은 학교를 중퇴하고 용돈 벌이로 시작했던 쿵푸를 '전업'으로 삼기에 이른다.

그가 다시 영화계에 입성한 것은 그로부터 멀지 않은 1964년이다. 롱비치에서 열린 무술 대회에 초청됐던 이소룡은 화려한 무술 실력으로 금방 할리우드 관계자들에 눈에 띈다. 그때부터 60년대 말까지 이소룡은 배우나 감독 작가 등 할리우드 관계자들에게 무술을 가르쳐주는 한편 '그린 호넷' '롱스트리트' 등의 TV시리즈와 '말로우' 등의 영화에 출연해 조연으로 이름을 날린다.

하지만 그에겐 더 큰 포부가 있었다. 홍콩으로 돌아가 제대로 된 무술 영화를 만들고 주인공으로 활약하겠다는 꿈이 있었던 것. 마침 당대 홍콩 최고의 영화사였던 골든 하베스타에서 그를 주연으로 한 영화 제작을 제안했다. 부름을 받고 한달음에 홍콩으로 귀국한 이소룡은 첫 주연작으로 '당산대형'을 찍으며 순식간에 아시아의 스타가 된다.

이어진 작품이 '정무문'과 '맹룡과강'이다. '정무문'에서는 반일감정과 민족의식이 결합된 내용 뿐 아니라 이소룡이 처음으로 선보인 쌍절곤 액션과 특유의 기합소리 일그러지는 표정 연기까지 더해져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맹룡과강'을 통해서는 극작가 감독 주연 무술안무의 1인 4역을 담당하며 그 재능을 뽐냈다. 이 작품에서는 가라테의 고수 척 노리스도 그의 적수 역을 맡아 활약했는데 두 사람은 이소룡이 처음 할리우드에 입문하는 발판이 됐던 롱비치 무술 대회에서 처음 만났던 것으로 전해진다.

아시아를 점령한 이소룡은 다시 할리우드로 눈을 돌린다. 홍콩의 골든 하베스트와 할리우드의 워너 브라더스가 최초로 합작해 만든 '용쟁호투'를 통해 세계 시장으로 발돋움을 시작했던 것. 하지만 이소룡은 '용쟁호투'의 촬영을 마무리하고 개봉을 3주 앞둔 1973년 7월 20일 전신발작과 뇌부종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다.

이소룡의 죽음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물론 그는 '용쟁호투' 촬영 중에도 뇌부종으로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간 병력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할리우드 제작자들과의 회의를 앞두고 두통을 호소해 약을 먹고 낮잠을 자던 이소령이 뇌가 잔뜩 부어 오른 채 사체로 발견된 사건은 팬들과 영화계 모두에게 갑작스런 충격이었다. 세간에는 음모설도 떠돌았다.

'갈기근육'의 시초
이소룡의 건강법

하루 식사 5끼로
유독 당근 좋아해
복근 단련에 신경


▷3피트 거리 내 펀치 도달 시간 0.05초 5피트 거리 내 펀치 도달 시간 0.08초

▷한 손으로 들 수 있는 역기 무게 75파운드

▷한손으로 턱걸이 50회 가능

▷양손 짚고 다리를 브이(v)자로 벌린 후 30분 버티기 가능

▷300파운드 샌드백을 옆차기로 천정까지 날릴 수 있는 파워

▷다른 사람이 손바닥 위에 동전을 쥐기 전에 낚아채 갈 수 있는 정도의 반사신경

▷한손 엄지와 검지만으로 팔 굽혀 펴기 가능

무술의 달인 이소룡이 펼칠 수 있는 동작들이다. 그는 무술 관련 서적 2500여권을 독파한 후 근력을 강화하기 위한 다양한 식이요법과 체력 단련 프로그램을 스스로 도입했다.

식이요법의 일환으로 이소룡은 주로 고단백 음료나 비타민 무기질을 많이 섭취했으며 고칼로리지만 몸에 도움이 안되는 정크푸드나 튀긴 음식은 피했다. 녹색 채소나 과일은 하루도 거르지 않았고 다양한 재료가 들어간 중식이나 아시안 음식을 즐겼다. 이소룡도 비타민 B나 C 레시틴(Lecithin granules) 꽃가루(Bee pollen) 로즈힙(Rose hip)등의 영양 보충제를 섭취했다. 칼슘은 단백질 음료로 보충했다.

몸의 신진대사를 활성화 하기 위한 방법으로 하루에 4-5번에 걸쳐 끼니를 먹었다. 탄수화물이 풍부한 과일과 채소도 거르지 않았다. 특히 당근을 좋아했다. 모든 과일과 채소에 당근을 섞어서 먹었다. 뿐만 아니라 로얄 젤리와 인삼도 비타민 보충제로 선호했다. 이들 음식은 빠른 에너지 대사 혈액 순환 피로 회복에 효과가 좋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홍차에 꿀이나 우유 설탕을 넣어 마셨다.

체력 단련 프로그램은 근력 강화 지구력 폐활량 유연성 4가지에 기준을 뒀다. 아령 팔굽혀펴기 턱걸이 등 보편적인 체력 단련 과정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는 체력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정신력을 강조했다.

이소룡은 무술인으로써 복근을 제일 중요시 했다. 모든 동작에 복근이 사용되는 것에 주목한 결과다. 이소룡의 미망인인 린다 리 캐드웰은 "이소룡은 하루 종일 복근력 강화에 신경쓰느라 TV를 볼 때도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했다"고 말했다.

오전에 3시간은 복근 단련 구부리기 조깅 웨이트 트레이닝 사이클로 구성했다. 보통 15-45분간 2-6마일을 뛰었으며 3-5마일 간격으로 속도를 바꿨다. 사이클은 45분간 10마일을 달렸다. 이 모든 것이 이소룡의 조각같은 몸매를 완성시켰던 노력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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