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부문 당선작…햄버거와 된장찌개
김은희
5월 햇살이 눈부신 교정에는 남녀중학생들이 장난을 치거나 재잘거리며 하교하는 모습이 한 점 수채화처럼 그려지고 있었다.
하루를 마감해 가는 오후시간 교무실 구석 자리에는 한 남학생과 여선생이 서로 마주본 채 앉아 있었다. 회색치마에 흰색셔츠를 입은 여선생의 긴 생머리는 노을 빛에 비쳐 평소보다 더 윤기 있어 보였고 화장기 없는 그녀 얼굴은 한 송이 백합처럼 맑고 화사했다.
"지만아 너 정말 왜 싸웠는지 말 안 할거니?"
여선생이 둘 사이에 흐르던 침묵을 깨며 먼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지만이는 아무 말 없이 계속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선생님이 널 혼내려는 게 아니야. 왜 싸웠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은 거야."
차분한 여선생의 목소리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선생님 치마대신 바지만 입고 다니면 안돼요?" 지만이가 고개를 들며 보채듯 말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니?"
"그러니까 그게……"
잠시 머뭇거리던 지만이는 이내 '아니에요. 됐어요.' 하고는 또 다시 고개를 떨궜다. 그때였다.
한 여자가 지만이 쪽으로 다가오더니 여선생을 향해 머리 숙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제가 지만이 엄마에요."
그러자 여선생도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아 그러세요? 제가 오전에 전화 드렸던 지만이 담임 정미경입니다. 바쁘실 텐데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선생님. 제가 진작에 찾아 뵙고 인사 드렸어야 했는데 이렇게 좋지 못한 일로 오게 돼서 정말 죄송합니다." 지만이 엄마는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잠시 후 지만이와 엄마는 담임선생님과의 상담을 마치고 교무실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지만이가 왜 싸웠는지 그 이유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너 정말 같은 반 친구와 왜 싸웠는지 끝까지 말 안 할거니?"
엄마 목소리에 고음이 섞였다.
"그 새끼 내 친구 아니거든!" 지만이 목소리에도 가시가 돋았다.
"너 엄마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
"더 심한 욕을 하고 싶은데 엄마 앞이니까 그나마 새끼라고 한 거야!"
"아니 이 녀석이 정말?" 말과 함께 엄마의 손이 허공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주위에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그녀는 이내 손을 내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지만이 너 이따가 집에 가서 보자."
2.
지만이 아빠 상우가 집에 도착한 건 밤 11시가 다 돼서였다.
"이제 오세요?" 상우 부인이 그를 맞이했다.
"지만이는?" 상우는 들고 있던 서류가방을 부인에게 건네며 아들을 찾았다.
"방에 있어요."
"아니 이 녀석 방에 있으면서 아버지가 왔는데 인사도 안 해?"
상우는 아들 지만이 방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부인이 상우의 팔을 잡아 당기며 말했다. "그냥 두세요. 지만이가 요즘 사춘기라 그런지 많이 예민해요."
"그래? 그나저나 날씨가 왜 이렇게 더운 거야? 나 좀 씻어야겠어."
"그러세요."
이제 막 5월의 문턱에 들어섰건만 날씨는 벌써 한 여름처럼 무더웠다.
열어 놓은 창문 틈 사이로 간간이 스며드는 바람에 아파트 단지 내에 만개한 아카시아 꽃 향기가 실려있었지만 무더운 날씨는 어쩔 수 없었다.
샤워를 마친 상우는 식탁에 앉아 늦은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당신이 끓여준 이 된장찌개는 언제 먹어도 맛있단 말이야!"
"된장찌개만요?"
"어디 된장찌개만이겠어? 청국장도 맛있고 해물탕도 끝내주지!"
상우는 또 다시 된장찌개를 한 수저 떠먹고 말을 이었다.
"근데 참 이상하지?"
"뭐가요?"
"내가 지만이 나이 때는 된장찌개나 청국장 같은 음식 근처에도 안 갔는데 나이가 들수록 이런 음식이 좋아지는 거 있지?"
"그러게 식성은 나이 따라 변한다잖아요."
"당신도 그래?"
"그럼요! 나는 뭐 사람 아닌가요?"
상우는 부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밥 그릇이 비어가자 부인은 보리차를 따라 상우에게 건네며 말했다.
"오늘 지만이 학교에 다녀왔어요."
"그래? 갑자기 학교는 왜?"
"그게 말이에요……"
잠시 머뭇거리던 부인은 지만이가 학교에서 같은 반 친구와 싸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아울러 먼저 주먹을 날린 지만이가 왜 싸웠는지 그 이유를 말하지 않아 잘못하면 학교에서 정학처분을 받을 수도 있다고 했다.
"아니 이 녀석 얌전하게 학교 잘 다니는 줄 알았더니 싸움질이나 하면서 사고를 쳐? 내 이놈을 당장!" 상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아들 지만이 방으로 향했다. 이윽고 상우가 방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갔지만 지만이는 책상에 엎드린 채 이미 잠들어 있었다.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내일 이야기해요? 안 그래도 내가 많이 혼냈어요."
언제 왔는지 부인이 상우의 팔을 잡아 당기며 말했다.
잠시 지만이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던 상우는 이내 그 모습이 측은한 듯 "자려면 편하게 침대에서 자지 불편하게 왜 책상에서 자?"라는 말을 나지막이 내뱉었다.
방금 전 화를 내던 모습과는 자못 다른 모습이었다.
상우는 아들 지만이를 들어 침대로 옮겼다. 무거웠다.
"지만이가 올해 몇 학년이지?"
"중학교 2학년이요. 당신은 어떻게 달랑 하나밖에 없는 자기 아들 학년도 몰라요?"
상우가 아들 지만이의 학년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늘 어린아이처럼 보이던 아들을 오랜만에 들어보니 어느새 어른 만큼이나 훌쩍 커버린 현실이 믿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제 그만 나가요. 당신도 주무셔야죠." 아내가 말했다.
"그래 그래야지."
상우는 아내를 따라 방을 나서다 책상 위에 켜있던 스탠드 불을 끄려고 발길을 돌렸다.
"이게 뭐지?" 상우가 책상 위에 펼쳐진 작은 노트를 집어 들며 말했다.
3.
상우가 발견한 건 아들 지만이의 일기장이었다.
지만이의 일기장을 들고 서재로 자리를 옮긴 부부는 한 동안 옥신각신했다. 일기를 봐야 지만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왜 싸웠는지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부인과 그러면 안 된다는 남편 상우의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다.
한참을 밀고 당기던 부부는 그 어떤 내용을 보더라도 절대 지만이에게 내색하지 말자는 조건하에 일기장을 보기로 합의했다.
서재에 있는 2인용 소파에 나란히 앉은 부부는 스탠드 불빛을 벗삼아 지만이의 일기장을 펼쳤다. A4용지 반 만한 크기의 일기장은 제법 두꺼웠다.
첫 장을 넘기자 '대한중학교 1학년 5반 이지만'이라고 적혀있었다.
아마도 지만이가 중학교에 입학한 후 구입한 것 같았다.
일기를 읽기 시작한지 십 여분쯤 지났을까?
일기의 대부분은 공부와 시험 그리고 장래 꿈 등에 관한 일상적인 내용들로 채워져 있었다. 일기 또한 매일 쓴 게 아니라 평균 2~3일에 한 번 꼴로 간단한 메모형식으로 쓴 게 많았다.
"별 내용 없잖아?"
상우가 따분한 듯 말하자 아내는 "빨리 다음 장으로 넘겨봐요"라며 남편을 재촉했다.
일기장이 중반을 넘어서자 어린 아이였던 지만이가 하나의 인격체로 성장하며 겪었던 고뇌와 갈등 등을 적은 제법 일기다운 장문의 글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모두 지만이가 중학교 2학년이 된 후 쓴 것들이었다.
상우가 또 다시 페이지를 넘기자 거기에는 일기대신 커다란 글씨로 '내 사랑 정미경! Love forever'라고 쓰여 있었다. 그 밑에는 빨간색 펜으로 그린 하트 모양의 그림도 있었다.
"내 사랑 정미경? 지만이한테 여자친구가 있었어?" 상우가 물었다.
"아니요. 여자친구 있다는 소리는 금시초문인데! 그나저나 정미경?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인데……"
부인은 이름을 곱씹으며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두 손을 마주치며 말했다.
"생각났어요!"
"아이쿠 깜짝이야!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나?"
"정미경은 지만이 담임선생님이에요!"
"뭐 담임선생님?"
부부는 잠시 할 말을 잃은 채 서로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시선을 일기장으로 옮겨 다음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다. 벽에 걸린 시계는 밤 12시가 넘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지만이의 러브스토리를 발견한 부부는 마치 고시를 준비하는 수험생의 진지한 모습으로 일기장을 꼼꼼히 정독하기 시작했다.
벽에 걸린 시계가 새벽 1시 반을 가리킬 무렵 부부는 지만이의 일기장을 손에서 내려놓을 수 있었다.
일기장에는 지만이의 러브스토리'뿐만 아니라 늘 일만 하는 아빠 공부만 강요하는 엄마에 대한 불만과 함께 형제 없이 외아들로 자라며 느꼈던 외로운 감정까지 빼곡히 적혀있었다. 그리고 같은 반 친구와 왜 싸웠는지 그 이유도 적혀있었다.
"지만 아빠 이제 어떡하면 좋죠?" 부인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말했다.
하지만 남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뭘 어떡해?" 라고 말했다.
"다른 건 당신과 제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지만 선생님을 사랑한다는 게 말이 되요? 그리고 앞으로 또 싸울 수도 있다잖아요?"
"그게 뭐 어때서?"
"여보! 지금 제 정신이에요?" 부인 목소리에 가시가 돋았다.
"걱정하지마. 나한테 좋은 방법이 있으니까!"
"좋은 방법이요?"
4.
다음날 회사에 출근한 상우는 오전 11시 밖에 되지 않았지만 책상 앞에 앉아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지난 밤 너무 늦게 잔 게 화근이었다.
"부장님 전화 받으세요!" 여직원이 다가와 말했다.
"어? 그 그래?"
상우는 졸음을 떨쳐내며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친구 선기였다.
"상우냐? 아침에 급한 회의가 있어 네 전화 못 받았다. 그런데 갑자기 최수지 선생님은 왜 찾아?"
"이유는 나중에 말해줄게. 찾을 수 있겠니?"
"글쎄다 지금쯤 퇴직하셨을 텐데 쉽진 않을 거야."
"야 교육청에서 일하는 놈이 선생님을 못 찾는다는 게 말이 되냐?"
"그럼 은행에서 일하는 넌 내가 부탁한 대출은 왜 못해주냐?"
"그건 임마 너희 집에 설정된 근저당이 많아서 그렇지!"
"녀석 웃자고 한 이야기에 죽자고 덤비긴? 농담이다 농담. 내가 이 한 몸 다 바쳐 최선을 다해 찾아보마."
"고맙다 친구야. 그런 너의 정신자세 나쁘지 않아 하하!"
친구와 전화통화를 끝낸 상우는 크게 기지개를 펴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침도 못 먹고 나와 오전 내 졸았더니 배가 고팠다. 상우는 갑자기 직원들을 향해 "자 여러분 밥 먹고 합시다!" 라고 크게 외쳤다.
큰 소리에 놀란 직원들이 저마다 시계를 보았지만 겨우 11시 30분이었다. 이를 인지한 상우는 머쓱한 표정으로 "내 말은 그러니까 삼십 분 후에 먹자고……" 라고 말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주5일 근무가 시작되고부터 상우는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친구들을 만나 술자리를 가지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회사를 마친 상우는 곧장 집으로 갔다.
"아니 웬일로 이렇게 일찍 들어오세요?" 부인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지만이 일기를 보고도 늦게 들어오면 그게 아빠야? 개빠지!" 상우는 들고 있던 서류가방을 부인에게 건네며 말했다.
"개빠가 뭐에요?"
"개 같은 아빠. 그나저나 지만이는?"
"학원 갔어요."
"참 학교에선 뭐래?"
"다행히 정학은 면했어요. 지만이가 처음 싸운 거고 그 동안 학교에서 모범적으로 생활해서 특별히 봐준대요. 대신 주말에 반성문 써서 월요일까지 제출하래요. 참 당신 저녁 드셔야죠?"
학원에 간 지만이 때문에 부부는 단 둘이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친 상우는 아내에게 녹차 한 잔을 부탁하곤 서재로 들어갔다.
"이게 어디 갔지?"
책장 앞에 선 상우가 무언가 열심히 찾기 시작했다.
잠시 후 부인이 녹차를 들고 와 상우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뭐하세요?"
상우는 대답대신 보고 있던 자신의 중학교 앨범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 분이 나 중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셨던 최수지 선생님이셔. 미인이시지?"
상우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흑백앨범 속 여인은 마치 아들 지만이의 담임선생님처럼 긴 생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이었다.
"미인이긴 한데 나보단 조금 덜 예쁘네요. 그나저나 중학교 졸업앨범은 왜 꺼냈어요?" 부인이 상우 옆에 앉으며 말했다.
"그건 말이지……" 상우는 곧 그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난 밤 아들의 일기를 본 상우는 느낀 바가 크다고 했다. 한 가족의 가장으로 경제적 의무만 다하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 때문에 아들 지만이와 많은 대화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반성했고 아울러 늘 바쁘다는 핑계로 자신의 삶에 큰 도움을 주셨던 선생님들에게 인간의 도리 제자의 도리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자책했다고 했다.
"직장생활하며 자식 키우다 보면 다 그렇죠." 부인이 상우를 변호했다.
"아니야. 내 잘못이 커. 최수지 선생님은 그냥 선생님이 아니거든."
"그냥 선생님이 아니면 어떤 선생님인데요? 당신도 지만이처럼 선생님을 열렬히 사랑했던 거에요?" 부인이 놀리듯 말했다.
"알고 싶어?"
부인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야기를 다 하려면 3박 4일쯤 걸리고 그걸 책으로 쓰자면 저 하늘이 원고지고 저 바닷물이 잉크라 해도 모자랄 텐데 그래도 듣고 싶어?"
"장난하지 말고 어서 애기해봐요. 당신하고 최수지 선생님하고 무슨 사이였어요 네?" 아내가 상우의 팔짱을 끼며 재촉했다.
그때였다. 소파 앞에 놓아둔 상우의 핸드폰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선기였다.
"상우야 나중에 크게 한 잔 사라! 최수지 선생님 찾았다!"
"정말이야?" 상우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응. 마지막 근무지가 강원도 속초 쪽에 있는 중학교였고 작년에 정년 퇴직하셨는데 아직 속초에 사신데."
"고맙다 선기야! 너 정말 큰 일했다."
그날 밤 학원에서 돌아온 지만이는 저녁을 먹고 부모님과 함께 거실 소파에 앉아있었다. 셋 사이에 잠시 적막이 흐르더니 상우가 입을 열었다.
"지만이 네가 학교에서 싸운 일 네 엄마한테 다 들었다."
지만이는 잘못했다는 듯 머리를 조아린 체 아무 말이 없었다.
"두 번 다시 학교에서 말썽 피우지 못하게 이 참에 아주 따금하게 혼 좀 내주세요" 부인이 거들었다.
"그럼 바늘 가지고 와!"
"바늘이요? 갑자기 바늘은 왜요?" 부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따끔하게 혼 내주라며? 바늘로 찔러야 따끔하지……"
순간 지만이가 손으로 입을 막으며 키득거렸다.
"넌 지금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니?" 엄마가 상우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지만이는 내일 아침에 아빠랑 같이 갈 데가 있으니 일찍 자거라."
"어디 가는데요?" 지만이가 물었다.
"그건 내일 돼 보면 안다."
자리에서 일어난 지만이는 부모님께 목례를 한 뒤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우리도 이제 그만 잡시다." 상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니 지만이 안 혼낼 거에요?"
"가끔은 혼내는 것보다 이렇게 모른 체 해주는 게 더 효과가 있어. 그리고 이번 일은 남자들 문제니까 나한테 맡겨두라고."
5.
토요일 아침 시계는 겨우 오전 8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지만이네 식구는 벌써 식탁에 모여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상우는 뚝배기에 끓여놓은 청국장을 행복한 표정과 함께 먹고 있었다.
하지만 지만이는 청국장 냄새가 싫은지 미간을 찌푸린 채 햄과 계란 말이 만 먹었다. 엄마는 지만이에게 편식하지 말고 골고루 먹으라며 청국장을 권했지만 지만이는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침식사를 끝낸 상우는 아들 지만이와 함께 아파트 입구로 내려와 친구 선기를 기다렸다. 기다린 지 한 십여 분쯤 지났을까? 부자 사이엔 그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지만이는 아파트 입구 난관에 기대선 채 휴대폰으로 친구들과 문자를 주고 받으며 게임만 하고 있었다. 이런 모습이 어제 오늘 일도 아니었건만 상우는 오늘따라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지만이가 어렸을 땐 목마도 태워주고 예쁘다고 물고 빨던 아들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상우는 아들 지만이에게 더 이상 그런 애정표현을 하지 못했다.
그때였다. 저 앞에서 승용차 한 대가 경적을 울리며 나타났다. 선기였다.
상우 앞에 차를 세운 선기는 앞 유리창을 내리고는 "어서 타"라고 말했다.
상우는 앞 좌석에 그리고 지만이는 선기에게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하며 뒷좌석에 올라탔다.
한 삼십 분쯤 달린 차는 청량리 역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선기는 자동차 트렁크를 열더니 기타를 가지고 나와 상우에게 건네주었다.
"잊지 않고 가져왔구나? 고맙다 친구야!" 상우가 말했다.
"웬 기타에요?" 지만이가 물었다.
"지만이가 몰랐구나? 너희 아버지 기타 완전 잘 치는데."
"정말요?" 의외라는 듯 지만이의 눈이 커졌다.
잠시 후 상우는 아들 지만이와 함께 속초 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자가용을 타고 편하게 빨리 갈수 있었지만 아들 지만이와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 열차를 선택했다. 아울러 바쁘다는 핑계로 잊고 살았던 소중한 옛 추억도 곱씹고 싶어서 완행열차를 선택했다.
열차에 올라 자리를 잡자 지만이가 여전히 신기한 듯 말했다.
"아빠 진짜 기타 칠 줄 아세요?"
"조금." 상우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빨리 한번 쳐봐요." 지만이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어릴 적 지만이의 모습 같았다. 그 모습을 본 상우는 마치 옛날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기타를 가져오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아들이 원하는데 어디 한 번 쳐볼까?"
상우는 케이스를 열고 기타를 꺼내더니 잠시 줄을 맞추며 음을 조절했다.
상우 앞 자리에 앉은 지만이는 호기심 많은 순수한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아빠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른 상우는 곧 기타 줄을 튕기며 전주부분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노래도 부르기 시작했다.
'나뭇잎 사이로 파란 가로등 그 불빛 아래로 너의 야윈 얼굴
지붕들 사이로 좁다란 하늘 그 하늘 아래로 사람들 물결
여름은 벌써 가 버렸나? 거리엔 어느새 싸늘한 바람
계절은 이렇게 쉽게 오가는데 우린 또 얼마나 어렵게 사랑해야 하는지
나뭇잎 사이로 여린 별 하나 그 별빛 아래로 너의 작은 꿈이'
노래 1절이 끝나고 상우가 또 다시 전주부분을 연주하자 기차 안에 등산복을 입고 있던 중년 남녀들이 약속이나 한 듯 '잘한다!'는 칭찬과 함께 박수를 쳤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지만이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졌다. 전주부분 연주를 끝낸 상우는 곧 2절을 부르기 시작했다.
'어둠은 벌써 밀려 왔나 거리엔 어느새 정다운 불빛
그 빛은 언제나 눈 앞에 있는데 우린 또 얼마나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지
나뭇잎 사이로 파란 가로등 그 불빛 아래로 너의 야윈 얼굴'
상우가 조동진의 '나뭇잎 사이'라는 노래를 끝내자 또 다시 주변 사람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쳐주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지만이는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우며 말했다.
"아빠 완전 멋져요!"
"정말? 아니다 너희들은 정말을 레알이라고 한다며 레알?"
"네 레알 멋졌어요. 아빠 그런데 기타는 언제 배웠어요?"
"오래됐지. 아빠가 우리 지만이 만할 때 배웠으니까."
"정말요? 그런데 왜 그 동안 한번도 안 쳤어요."
상우는 아들 지만이에게 자신의 첫사랑 때문에 기타를 배우게 됐으며 아울러 첫사랑 때문에 그 동안 기타를 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자 지만이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엄마가 아빠 첫사랑 아니었어요?"
"아니. 아빠 첫사랑은 따로 있지."
"그게 누군데요? 아빠 첫사랑 이야기 해주세요."
오랜 시간 단절되었던 부자간의 대화가 상우의 기타 연주와 노래 한 곡으로 다시 재개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아빠 앞에서는 말도 없이 늘 친구들과 문자만 주고받던 지만이의 휴대폰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아빠가 첫사랑 이야기 해주면 지만이도 아빠한테 지만이 첫사랑 이야기 해줄래?"
지만이는 대답대신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숨을 고른 상우는 이내 아련해진 옛 추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6.
82년 3월 입춘도 지났건만 늦추위가 연일 차가운 바람을 토해내고 있었다.
중학교에 입학한 상우는 교칙에 따라 머리를 빡빡 깎은 채 시커먼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갔다. 중학교에 입학한지 1달이 지났지만 상우네 반은 아직 담임선생님이 없었다. 담임으로 배정된 선생님이 교통사고를 당해 한 달 후에나 오신다고 했다. 그래서 다른 선생님들이 돌아가며 임시담임을 맡고 있었다.
상우네 교실 정 중앙에는 석탄으로 가열되는 원통모양의 난로가 온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난로 위에는 아이들이 올려놓은 다양한 크기의 양은 도시락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비좁은 낡은 목조 책상 앞에 앉은 상우는 짝꿍 선기와 함께 서로의 짧은 머리를 만져가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상우야 너 프로야구 어린이 팬클럽에 가입할거야?" 선기가 말했다.
"그게 뭔데?"
"야 넌 어떻게 프로야구 팬클럽도 모르냐? 우리 나라도 미국처럼 프로야구가 생겨서 다음 달에 드디어 개막하잖아? 그래서 지금 어린이 팬클럽 회원을 모집한대!"
"거기 가입하면 좋아?"
"그럼 당연하지. 모자도 주고 가방도 주고 티셔츠도 준데!"
"공짜로?"
"아니 가입비 내야지."
"가입비가 얼만데?"
"오천 원."
"뭐 오천 원? 야 그거 내 한달 용돈이야. 난 돈 없어서 못해."
그때였다. 맨 뒷줄에 앉아있던 경민이가 다가오더니 선기의 뒤통수를 치면서 말했다. "야 김선기! 학교 앞 문방구에 가서 노가리 오백 원어치만 사와."
"또?"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듯 선기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래. 근데 너 얼굴 표정이 매우 칙칙하다. 왜 하기 싫어? 그럼 맞던가!"
"아 아냐. 갖다 올게." 선기는 억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당연히 그래야지!" 경민이는 선기의 머리를 툭 치더니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선기야 너 언제까지 경민이한테 당하고 살 거야?" 상우가 말했다.
"매일 있는 일도 아니고 괜찮아. 경민이 제 나랑 국민학교 동창인데 싸움으로 늘 캡 먹은 애야. 괜히 말 안 들어서 얻어 터지는 것 보단 나."
그때였다. 한 아이가 교실로 뛰어 들어오면서 '선생님 오신다' 라고 외쳤다. 교실 안 여기저기서 장난치던 아이들은 순식간에 제 자리로 돌아가 쥐 죽은 듯 조용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윽고 교실 앞 문이 열리더니 한 여인이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상우의 눈이 왕방울처럼 커졌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교실로 들어온 그녀는 분필을 들어 칠판에 자기 이름을 적기 시작했다.
최
수
지
이름을 다 적은 여선생은 아이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상우 눈에는 그 모습이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슬로우모션처럼 보였다.
어깨까지 내려온 윤기 있는 생머리 화장기 없는 맑고 청아한 얼굴!
게다가 학생들을 향해 살짝 미소 지을 때 생기는 양 볼의 보조개!
상우는 순간 숨이 멎는 듯 했다.
최수지 선생은 이윽고 아이들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자기가 교통사고 때문에 늦게 학교에 온 담임선생이라고…… 그녀의 목소리는 지적이면서도 낭랑하고 아울러 품위도 있었다.
상우 눈에 비친 최수지 선생은 이 세상 최고의 여인이었다.
상우가 여자를 보고 가슴이 뛰어 보기는 난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상우는 잡지책 '선데이 서울'의 표지를 장식하던 인기여배우 유지인 정윤희도 그저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랬던 상우 마음에 최수지 선생은 어느 날 한 마리 나비처럼 사랑의 향기를 듬뿍 안고 날아들었다.
7.
최수지 선생을 만나고 난 후 상우의 학교생활은 몰라보게 좋아졌다.
평소 공부에 관심이 없던 그였지만 최수지 선생이 '노력하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말한 것에 자극 받아 공부뿐 만 아니라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최수지 선생의 담당과목인 국어에 특히 관심을 보이고 다른 과목에 비해 더 열심히 공부했다.
최수지 선생이 가끔 수업 중에 읽어준 시나 문학작품은 따로 책을 구입하거나 빌려서 공부하고 외울 만큼 상우의 학교생활에 최수지 선생은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상우의 변한 모습을 본 친구 선기는 '사람이 평소 안 하던 짓 하면 금방 죽는다'고 놀렸지만 상우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공부뿐만 아니라 학급청소나 미화활동 등에도 늘 앞장 서 노력하는 상우를 최수지 선생 또한 아끼고 귀여워해주었다.
최수지 선생이 상우의 머리라도 한 번 쓰다듬어주면 상우는 기뻐 날아갈 것 같은 감정에 휩싸이곤 했다. 상우는 국민학교 때도 쓰지 않던 일기를 최수지 선생 때문에 쓰기 시작했다. 최 선생이 일기를 쓰면 자기 생활을 뒤돌아 볼 수 있고 삶을 좀 더 규칙적으로 살 수 있다고 조언했기 때문이었다.
상우가 기타를 배우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최 선생이 아이들 성화에 못 이겨 수업시간에 자신의 첫사랑 이야기를 해주며 대학교 때 통기타를 치면서 조동진의 노래를 멋들어지게 불러주었던 같은 과 선배가 자신의 첫사랑이었다고 이야기해준 것에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상우는 기타를 배우면서 조동진의 노래는 무조건 다 외워서 연주할 수 있도록 연습했다. 비록 얼굴 한 번 본적 없지만 과거 최수지 선생이 사랑했던 그 첫사랑 남자에게 질 수 없다는 일종의 오기가 발동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쉬는 시간에 다음 시간 수업 준비를 하던 상우에게 선기가 다가와 말했다. "상우야 나 따라와 바. 내가 재미난 거 보여줄게!"
선기는 상우를 화장실로 데려가 주위를 살피고는 교복 안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주었다.
"이게 뭔데?" 상우가 말했다.
"펴봐. 완전 끝내줘!"
궁금한 표정으로 상우가 접힌 종이를 펴자 거기에는 여자의 나체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최수지'라고 쓰여 있었다.
상우는 순간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들고 있던 종이를 발기발기 찢어버린 상우는 선기의 멱살을 움켜잡으며 말했다.
"야 이 새끼야! 너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평소 온화한 성격이었던 상우가 화내는 걸 처음 본 선기는 크게 놀란 표정으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 그림은 경민이가 그린 거였고 경민이가 강제로 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산 그림이었다고 했다.
선기의 설명이 끝나자 상우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서 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선기도 상우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잠시 후 교실에 도착한 상우는 뒷문으로 들어가 창가 맨 뒤에 앉아있던 경민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말했다.
"야 나경민! 니가 최수지 선생님 나체그림 그렸어?"
"왜 너도 필요해? 한 장 살래?"
경민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상우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허공을 가른 주먹은 경민이 얼굴 가운데에 정확히 꽂혔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경민이가 의자에서 쓰러졌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반 친구들이 웅성거리며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상우는 어디서 그런 힘과 용기가 났는지 경민이 배 위에 올라타 계속해서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경민이 얼굴에 사정없이 주먹을 날려 대는 상우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8.
"와 우리 아빠 완전 멋있다! 그러니까 아빠가 학교 짱이랑 싸운 거네요?"
"그런 셈이지. 너희들은 짱이라고 하지만 아빠 때는 캡이라고 했지."
"근데 눈물은 왜 흘린 거에요?"
"그건 말이지……" 상우는 왜 눈물을 흘렸는지 아들 지만이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 눈물은 일종의 분함과 미안함의 표출이었다고 했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경민이가 한낱 장난거리로 이용한 것에 대한 억울함과 분함 그리고 소중한 선생님을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한 죄송한 감정이 교차되면서 미안해서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난 아빠 마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만이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 너도 아빠랑 비슷한 경험이 있니?"
"네 아니요 그게 그러니까……" 지만이는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상우는 아들의 일기장을 봐서 지만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해주었다.
세 시간 정도를 달린 기차는 속초에 도착했다.
상우와 지만이는 다행히 그곳 지리를 잘 아는 택시기사를 만나 큰 어려움 없이 선기가 알려준 선생님 동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내에서 약 40분쯤 떨어진 그곳은 멀리 바닷가가 보이는 작은 전원주택단지였다. 유럽풍의 목조건물로 지어진 집들 앞 마당엔 푸른 잔디가 풍성하게 자라고 있었고 하얀 색 페인트로 칠한 낮은 나무담장은 이국적인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아빠 여기에요?" 주소를 들고 앞서 걷던 상우가 말했다.
상우는 대문 앞에 도착해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잠시 후면 만나게 될 자신의 첫사랑이자 은사님과의 재회가 설렜기 때문이었다. 무려 30년만의 만남이었다.
상우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자 백발에 뿔테안경을 쓴 노신사가 걸어 나왔다.
상우는 노신사에게 예를 갖춰 정중히 목례한 후 말했다.
"저 여기가 최수지 선생님 댁인가요?"
"그렇소만 뉘신지요?" 노신사는 안경을 치켜 쓰며 말했다.
노신사 머리에 내린 하얀 서리와 얼굴에 핀 주름 꽃 때문에 처음에는 몰라봤었다. 하지만 근거리에서 자세히 보니 그는 바로 상우가 한때 미워했던 최수지 선생의 남편 되는 사람이었다.
최수지 선생을 사모하며 학교생활에 충실하던 상우에게 어느 날 최수지 선생이 결혼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었다. 그리고 남편을 따라 부산으로 전근 간다는 소식은 더욱 더 큰 충격이었다. 지금 상우 앞에 서있는 노신사는 바로 최수지 선생이 아이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함께 교정을 걸어나갔던 바로 그 남자였다. 멀어져 가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몰래 숨어서 눈물 흘리며 훔쳐봤던 기억이 순간 상우 머리 속에 떠올랐다.
자신의 신분을 소개한 상우는 노신사를 따라 집 안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노신사는 최수지 선생에게 올 초부터 치매증상이 생겼다고 했다. 그래서 상우를 몰라보더라도 놀라거나 섭섭해 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노신사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서자 깔끔하게 정돈된 실내가 인상적이었다.
잠시 소파에 앉아 기다리라고 한 노신사는 방으로 들어가 최수지 선생을 부축해 나왔다. 최 선생을 보자 또 다시 상우의 심장이 그 옛날 선생님을 처음 봤을 때처럼 멎는 것만 같았다.
최수지 선생의 얼굴에도 세월자국은 역력했다. 그 맑고 맑던 피부에는 주름 꽃이 만개했고 윤기 있던 긴 생머리는 어느새 하얗게 희어 손질하기 편한 파마머리가 되어있었다. 시력이 안 좋은지 선생님 눈에는 안경도 씌워져 있었다.
"이게 누구야? 네가 정말 신림중학교에 다녔던 이상우 맞니?" 선생님은 상우의 두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네 선생님. 저 상우 맞아요. 그 동안 안녕하셨어요?"
"아니 이 녀석아 왜 이제야 왔어? 선생님이 널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데?"
"죄송해요 선생님."
"옛 제자가 찾아와서 그런지 오늘은 이 사람 정신이 맑은가 봅니다. 바로 알아보네요 허허!" 노신사가 웃으며 말했다.
상우는 아들 지만이와 함께 선생님 내외에게 큰 절을 올렸다. 그리고 그 동안 못한 밀린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런데 저 기타는 누구 거야?" 최 선생이 지만이 옆에 놓인 기타를 발견하고 말했다.
"아 저거요. 제가 가져왔습니다."
"상우 네가 기타도 쳤었니?" 최 선생이 안경을 치켜 쓰며 말했다.
"잘은 못 치고요 조금 칩니다."
"그래? 그럼 이 선생님을 위해서 기타 치면서 노래 한 곡 불러주겠니?"
상우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는 케이스를 열고 기타를 꺼냈다.
최 선생님이 기타 잘 치는 같은 과 선배를 좋아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열심히 기타를 배웠지만 선생님이 갑자기 결혼과 함께 전근 가느라 열심히 배웠던 기타 실력을 보여주지 못했었다. 그게 두고두고 한이 되었는데 30년 만에 그 한을 풀게 되었다.
상우가 "선생님이 좋아하는 조동진 노래 불러드릴게요."라고 말하자 선생님은 해맑은 미소와 함께 "아니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니?" 라고 말했다.
선생님을 바라보며 미소 짓던 상우는 곧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조동진이 부른 '행복한 사람'이란 노래였다.
'울고 있나요? 당신은 울고 있나요? 아아 그러나 당신은 행복한 사람.
아직도 남은 별 찾을 수 있는 그렇게 아름다운 두 눈이 있으니……
외로운 가요? 당신은 외로운 가요? 아아 그러나 당신은 행복한 사람.
아직도 바람결 느낄 수 있는 그렇게 아름다운 그 마음 있으니……
아직도 남은 별 찾을 수 있는 그렇게 아름다운 두 눈이 있으니……
노래와 함께 기타 연주가 끝나자 최 선생은 힘없이 박수를 치며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본 노신사는 "아니 이 사람 갑자기 왜 울어?" 라고 말했다.
그러자 최 선생은 "좋아서요. 그리고 행복해서요. 옛 제자가 찾아와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주니 너무 행복하네요. 노랫말처럼 나는 행복한 사람인가 봐요!" 라고 말하더니 안경을 벗고 눈물을 닦았다.
9.
선생님과의 짧은 재회를 끝낸 상우는 '자주 찾아 뵙겠다'는 약속을 남긴 체 서울행 밤차에 몸을 실었다. 창 밖에는 어둠이 짙게 깔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상우 머리 속에는 선생님과 함께했던 그 옛날 소중한 추억들이 풍성하게 다시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아들 지만이가 말했다.
"아빠 나 아빠한테 할 말 있어요."
"무슨 말?" 상우는 선생님과의 소중한 추억을 잠시 접어놓은 채 아들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지만이는 자신도 학교 담임선생님을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며칠 전 싸운 이유도 설명해주었다. 같은 반 친구가 치마 입은 선생님의 예쁜 다리를 핸드폰으로 몰래 촬영해 재미 삼아 인터넷 카페에 올렸기 때문에 싸웠다고 했다.
"우리 아들 그래서 싸웠구나?"
"네."
"잘했어. 그런 일이라면 다음에 또 싸워도 돼!"
"정말요?"
지만이는 꾸중 대신 자기를 응원해주는 아빠가 너무 고마웠다.
상우는 아들 어깨에 자신의 팔을 두르고는 말을 이었다.
"지만아 아빠도 네 나이 땐 햄버거 같은 음식만 좋아하고 된장찌개나 청국장 같은 음식은 정말 싫어했거든. 그런데 나이가 드니까 된장찌개나 청국장 같은 음식이 너무 좋은 거야!"
지만이는 귀를 쫑긋 세운 채 아빠 말을 경청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식성이 바뀌듯 사랑하는 상대도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바뀌게 마련이야. 중요한 건 누구를 사랑하느냐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느냐가 중요한 거야.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지만이 네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해 주면 되는 거야 알겠니?"
"조금 어려운데 무슨 말인지 알 것 같기도 해요." 지만이가 웃으며 말했다.
상우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들과 함께 한 이 짧은 주말여행도 언젠가는 애틋하고 소중한 추억이 되어 아들과 자신의 삶을 풍성하게 해주리라고 말이다.
〈끝〉
수상소감
"좋은 글 많이 쓰겠습니다"
먼저 저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아주신 관계자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지난 2010년도에 처음 중앙신인문학상에 도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작년(2011년)에는 '코파카바나에 뜨는 달'이란 작품으로 결선까지 올랐으나 수상의 영광은 맛보지 못했습니다. 아쉬움을 뒤로한 체 올해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또 다시 도전했는데 덜컥 당선이란 큰 기쁨을 안게 되었습니다.
건조해지기 쉬운 이민생활에서 글쓰기 작업은 저만의 쉼터이자 친구입니다.
이런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중앙신인문학상'이란 뜻 깊은 대회를 지속적으로 주관해 주시는 미주중앙일보사에도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계속해서 좋은 글을 많이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이 중앙신인문학상 수상자의 책임이자 본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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