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의 경기라면 유독 피가 끓어오르는 한인들에게 이명박 대통령이 헌정 사상 최초의 대통령 독도 방문을 강행, 한·일 관계가 급랭하는 시점에서 벌어진 한·일전은 '절대로 패하면 안되는 경기'일 수 밖에 없었다. 그만큼 승리의 기쁨도 컸다.
경기 종료 뒤 풀썩 주저앉은 일본 선수들을 배경으로 태극전사들이 대형 태극기를 들고 그라운드를 누비는 순간, 관중석에선 소형 태극기가 펄럭였고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글도 보였다. 많은 한인들의 눈가는 촉촉히 젖었다.
▶결승보다 더 짜릿
한·일전 승리를 지켜본 한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올림픽 축구 사상 첫 동메달보다 일본을 이긴 것이 더 기쁘다"며 싱글벙글. 축구광이라는 김봉식씨는 "준결승에서 한국과 일본이 패해 한·일전이 성사될 때만 해도 일본에 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했던 것이 사실"이라며 "올림픽 첫 4강 진출에 일본을 이기고 동메달을 따내는 기막힌 해피엔딩은 어떤 각본으로도 만들 수 없는 드라마"라며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바쁘다, 바빠
한인 식당들은 한·일전 전날부터 대표팀 선수들 못지 않게 바쁜 날을 보냈다. 좌석 예약부터 경기중계 여부 문의로 전화통에 불이 났기 때문. 인터넷 채널을 TV로 연결하는 등 '경기 준비'에 만전을 기하느라 직원들은 쉴 틈이 없었다. 버몬트와 7가 인근 한 식당 주인은 "식당이 넓은 편이라 TV와 먼 자리에 앉으면 시청이 불편하기 때문에 테이블 배치를 다시 했다. 평소의 두 배에 가까운 손님들이 몰려 일손이 모자랄 정도였다"고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많은 식당들은 점심시간인데도 맥주 등 주류가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모처럼의 대박을 구가했다.
▶남자보다 더 열성
김지은씨는 2명의 여성 친구와 응원을 위해 식당을 찾았다. 김씨는 경기 시작 전 "여자라고 축구에 관심 없을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어지간한 남자들보다 열성적으로 올림픽 축구를 빠짐없이 챙겨봤다. 특히 한·일전은 절대 놓칠 수 없어 간만에 축구 광팬 셋이 뭉쳤다"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김씨 일행은 불판의 고기가 타는 것도 모르고 TV에 시선을 고정시키며 열성 팬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했다.
▶떠나온 가족 생각
유학생 김대영씨는 "한국을 떠나온 뒤로 오늘만큼 한국인임을 자랑스레 여긴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경기가 끝나고 선수들이 펄럭이는 대형 태극기가 눈가를 촉촉히 적셨다"고 채 여운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감격을 전했다. 그는 "정신없이 응원을 하다보니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보고 싶어졌다. 고등학생 동생도 방학이라 모두 거실에 삼삼오오 모여 경기를 시청했을텐데 나 혼자 외지에서 보려니 씁쓸한 느낌도 들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