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아의 격변에서 이젠 작은 여유 찾기- 황석영 암 투병 고통속에서 처절한 글쓰기 투혼- 최인호 문학이여! 아직도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박범신
황석영, 최인호, 박범신…. 이름만으로도 책을 읽게 한다. 그들은 모두 같은 시대에 굵은 펜자국을 남기며 걸어왔다. 그리고 이제 초로의 언덕에서 석양을 바라보고 있다. 또한 오늘도 식지 않는 열정으로 '이야기'의 지평을 새롭게 열고 있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왕성하게 활동하며 신작을 발표한 이들은 40대 이상의 남성들을 독자층으로 끌어들이는 파워를 발휘했다. 황석영의 '낯익은 세상'(문학동네)과 최인호의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여백미디어)는 40% 이상이 중년 남성 독자들이었고, 박범신의 '은교'(은행나무)는 전자책 부문에서만 2만5000부가 팔리면서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다. 자기 계발 분야의 책들이 대거 베스트셀러가 되는 경향을 뚫고 순수 소설이 큰 주목을 받고 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특히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3인의 작품들은 삶의 생명력을 생생하게 표현하는 힘이 있고, 가치의 본질을 찾기 위해 정면 승부도 마다하지 않는 솔직한 기백을 지녔기 때문에 이민사회의 독자들에게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황석영, 최인호, 박범신 작가는 독창적인 문학의 세계를 각자 구축했지만, 이들의 개별적 삶 속에선 굴곡진 시대를 함께 넘어오면서 그려낸 인생의 공통 분모를 발견할 수 있다.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3인의 작가는 이제 원로작가라 칭함을 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삶 속에서 우리가 직시해야할 나침반의 방향을 가리키며, 작품 속에서 한결같이 굴하지 않는 젊음의 빛을 뿜어내고 있다.
◆시련의 벽을 넘어
정치적으로 척박한 시대에 '노동'과 '빈곤'의 문제를 예리하게 파헤치며 붓을 들었던 황석영 작가는 유난히도 시련이 많았다. ‘객지’, ‘삼포가는 길’ 등의 작품을 통해 산업화 사회의 모순을 비판했고, 투철한 시대의식을 반영했던 그는 1989년 북한을 방문했다가 귀국하지 못하고 2년여 동안 독일 베를린에 머물렀다. 1993년에 귀국과 동시에 5년의 세월을 독방에 수감되는 불운을 겪었다.
작가 박범신은 현대인의 욕망과 좌절을 통해 비정한 문명과 인간성에 대해 비판하는 작품들을 다수 집필하면서 한 때 '대중작가'라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었다. 그 때의 절망을 박 작가는 이렇게 회고한다.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것이 문학적 동료들에게는 인민재판을 받아야하는 상황은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도망치듯 시작한 칩거 생활 중에 자살을 시도하는 끔찍한 상황도 맞아야 했다. 쓰러진 나를 아내가 병원으로 옮기던 날 저녁 풍경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박 작가는 수 년 동안 펜을 꺾고 히말라야를 오르는 철저한 야인의 삶을 통해 심연에 가라앉은 문학적 감성을 힘겹게 길어올렸다.
최인호 작가는 70년대 대표적 소설가로 자리매김하면서 그 역시도 '대중 작가'라는 꼬리표가 붙여졌지만, 그 이후 역사와 종교소설을 발표하면서 굵직한 심상을 반영하는 변화된 제 2의 작품세계를 구현했다. 지금 그는 암과 투병 중이다. 발병 시 최 작가는 좌절과 고통으로 4년여 동안 세상과 단절하는 긴 침묵의 시간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는 신앙의 힘과 문학적 숨 고르기 과정을 통해 '현대소설'로 복귀함으로써 왕성한 제3의 문학기를 맞고 있다.
◆초로의 산등성이에서
육신은 황혼에 서 있으나, 3인의 작가들은 더 새로운 작품을 향해 산등성이를 넘는다.
황석영 작가는 말한다. "이젠 햇살도 좀 쬐고, 즐길 줄도 알고 상대방 의견도 들어주는 여유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신작에 전념 중인 황 작가는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서재에서 보낸다. 덜어내고 또 덜어내고도 남은 4500여 권의 책들과 벗하며 그가 지금 바라보는 세상을 관조적 눈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 작은 공간엔 책을 빌려보기에도 목이 마른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겨있고, 백일장에 나가 1등을 한 꼬마 작가와 격랑기를 지나오던 매서운 청년작가의 모습도 어려있다. 황 작가는 인터넷에 ‘강남몽’이란 작품을 연재하면서 독자와의 '사소한 소통'을 즐기게 되었다. 그는 아직까지도 다른 방식, 다른 소재를 가진 '황석영식'의 작품을 열망한다.
박범신 작가의 신작은 호수가 바라다보이는 '논산 서재'에서 탄생되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로 내려간 그는 그 서재에서 외로움과 눈물의 의미를 찾아간다. 그 특별한 공간에는 과거의 그가 남아 쉼없이 말을 걸어온다. 배고팠던 어린 소년, 문학의 열정과 순수로 빛나던 시절들이 그에게로 걸어온다. 그 안에서 박 작가는 이런 독백을 남겼다. "아무 것도 필요없다. 지금은 다만 환해지고 싶다. 따뜻해지고 싶다." 그 역시 SNS를 통해 솔직하게 토해내는 '날 것'의 묘미에 열중한다. 그리고 새로운 출발을 시도하며 노년의 평안함을 거부하는 영원한 '청년작가'이기를 갈망한다.
최인호 작가는 암과 맞서게 되면서 단순한 삶을 즐기기 시작했다. 출판사에 마련된 집필실에서 하루 종일을 보내고 오후 6시가 되면 집으로 향한다. 그의 생활의 전부다. 아내가 6시간 동안 쇼핑하는 시간을 흐뭇하게 기다리기도 하고, 아침 6시엔 산을 오르며 아직도 몽블랑 만년필로 원고지에 글을 쓴다. 암이라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그는 평화로운 안식을 찾아내었고, 단숨에 쭉 들이키는 생수와도 같은 작품을 뽑아냈다. "하나님께서 남은 인생을 더 허락해 주신다면 나는 제 3의 문학으로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고 고백하는 최 작가에겐 오늘 하루도 저물지 않는 시작의 시간이다.
낯익은 것에 나의 사랑은 살아있다
◆황석영의 '낯익은 세상'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국 리얼리즘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왔던 황 작가는 '낯익은 세상'(문학동네 펴냄)을 통해 다른 세계로의 변모를 보여준다. 한 편의 슬픈 동화같은 이 작품은 예전 쓰레기 매립지였던 난지도를 배경으로 한다. 난지도의 옛 지명인 '꽃섬'에서 1980년대 빈민들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인간 욕망의 찌꺼기들이 모여드는 쓰레기 매립장에서 현대사회가 가져온 '소외'와 '상실'을 '딱부리'라는 열네 살 소년의 눈으로 투영한다.
"쓰레기 매립지는 현실과 가장 가까운 곳이죠. 결국 우리가 물질이나 사물의 지옥에 둘러싸여있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장소입니다. 여기에 매몰된 인간이 어떻게 본래의 인간성을 되찾을 수 있을까하는 이야기죠. 난지도엔 이름모를 풀꽃들도 많이 피었는데, 여기에서 섬이 가진 원래의 영성을 도깨비로 표현하고, 이 도깨비들이 아이들과 소통하는 것이 전체의 흐름입니다." 황 작가는 밑바닥을 살아가는 작은 영혼들을 통해 쓰레기 더미 안에서 본래의 생명을 일깨우려는 스토리 속에서 그가 세상을 사랑하는 특별한 방식을 설명했다.
이 작품을 끌어가는 작가의 필체는 예전에 비해 한층 추상화되고 있는 변화를 보인다. 현실을 왜곡하거나 변형시키지 않지만, 사건의 배치가 독특하고 엉뚱하다. 주인공이 아이들이기에 추상화하는데 적합하다. 작가의 눈길은 가난한 사람들의 공동체적 식사, 어른 되기를 거부하는 아이들의 천진성, 자연의 질서에 대한 눈뜸에 직시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개별적 이름이 없이 '딱부리, 땜통, 방개, 송장 메뚜기, 빼빼엄마'등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작품 전체의 상징적 의미를 표현하게 된다. 황석영은 다음 작품으로 조선 말기에 온갖 풍랑을 겪는 이야기꾼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50주년 기념작으로 준비하고 있다. 최근에 ‘삼포가는 길’이 영어로 출간되었고, '오래된 정원'은 스웨덴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다.
◆최인호 -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두 달만에 3일 동안의 스토리로 엮은 '낯익은 사람들의 도시'(여백미디어). 이 작품은 작가의 자전적 회고록이라 할 수 있다. 그 동안의 삶을 되돌아보며 진정한 자신과의 만남을 준비하는 과정을 써내려간 소설이다. 주로 연재를 해오던 최 작가에게 있어서 이 책은 최초의 전작 소설이다. 역시 최 작가도 이 작품을 통해 순수소설로의 회귀를 선언하고 있다. 마치 100미터를 전력질주하듯 빠르고 강렬한 문체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단숨에 빠져들게 하는 마성을 갖는다.
단란하고 모범적 가장인 K라는 주인공은 현실에 충실한 제도적 인간의 형상이다. 하지만 일상이 조작되고 현실에 균열이 생기면서 K는 환상과 실제의 시간을 오가면서 본질적인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역할'만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일상과의 이별을 통해 발견하는 '진짜 삶'이 우리 앞에 있어야함을 작가는 말한다.
이 달 들어 최 작가의 신작 소설 '공자'와 '맹자'도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두 철인의 사상을 에피소드 중심으로 끌고 가지만, 사상을 해석해나가는 작가의 이야기가 덧붙여져 오늘의 관점을 새롭게 들여다볼 수 있다. 최인호는 "신 춘추전국과도 같은 난세에 이 책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적었다.
◆박범신 - '나의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가장 최근의 신작인 박 작가의 '나의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은행나무)는 작가가 고향인 논산으로 내려간 후 '페이스북'에 쓴 일기를 모은 것이다. 소설 대신 어떤 날에는 술이, 또 다른 날에는 눈물이 섞여 써내려간 일기가 독자들과 만나면서 평온한 기쁨으로 변했고, 그의 문학에 대한 뜨거운 그리움이 책 안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지나간 삶과 앞으로의 인생에 대한 고뇌가 배어 나오는 글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삶의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끝없이 사람 사이로 가고 싶은 욕망과 끝없이 사람을 등지고 싶은 욕망의 간극 사이에 내가 서 있다. 그 두 가지 욕망은 마치 찰나의 영광과 불멸의 꿈처럼 멀다. 하나의 길은 현실에 있고 다른 하나의 길은 초월에 닿아 있다. …… 나는 젊은 날, 나라는 존재가 별처럼 빛나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젊은 내 안에 차 있는 빛을 보았더라면 나의 인생은 보다 우렁차고 싶어졌을 것이다.”(책 본문 중에서 )
스크린셀러로 유명한 '은교'는 육신은 늙었으나 영혼과 욕망을 담은 젊은 시인의 순애보이다. 예순아홉의 노인이 열일곱 살 소녀를 사랑한다는 이야기지만 부적절한 욕망의 회고록은 아니다. 박 작가는 "25살부터는 새로 태어나는 세포들은 없고 오로지 죽어가는 세포들만이 남는다. 하지만 멈추지는 않고 늙지도 않는 감정들은 나이가 들면서 컨트롤 해야만 한다"라고 말함으로써 은교가 지향하는 정신세계를 또렷하게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