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동안 가슴속에 파묻었던 한이 한번에 터져 나온 것일까? 첫만남, 1시간으로 정해진 상담시간 내내 잠시도 쉬지 않고 그녀는 자신의 삶을 토해내는 듯했다.
초점 잃은 눈빛, 온갖 삶의 고뇌를 담은 듯한 얼굴. 서럽게 쏟아 내는 눈물.
50대 중반의 그녀는 대학을 다니는 두 남매의 엄마이며, 이제는 그 질기고 질긴 남편과의 인연의 고리를 끊어 버리고 싶다고 했다.
신혼의 달콤함이 채 가시기도 전 시작된 남편으로부터의 구타와 폭력은 26년간 '결혼'이라는 끈과 두 아이의 엄마라는 고리로 그녀를 묶어 그녀로 하여금 그렇게 삶을 체념하며 살게 만들었다.
이제는 신체적, 정신적 건강의 피폐는 물론 영혼의 공허함까지 느껴져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했다.
처음 남편으로부터 구타를 당했을 때는 나에게 무슨 잘못이 있으려니 생각했고, 구타 후에 더욱 다정하게 다가온 남편의 모습 때문에 한번의 실수이니 용서해야지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구타는 계속되었고, 심한 욕설은 물론 성적 학대까지 감수해야 했는데, 그래도 그때마다 내가 사랑해 선택한 남편인데, 참고 견디자고 다짐했고, 점점 커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인내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내와 가정을 지키고자 하는 그녀의 노력은 오히려 남편의 구타와 폭력을 습관성이 되도록 부추겼고, 매주 금요일은 의례 '매맞는 날'로 정해지다시피 해서, 금요일만 되면 집에 들어가기가 두려워 집 밖에서 울곤 했다는 것이다.
견디다 못해 몇 차례 집을 나오긴 했지만, 그때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남편의 모습이 측은해서, '그래 나 아니면 이 사람, 누가 받아줄까' 하는 생각과 '그래도 아이들 생각해서..'라는 마음으로 다시 가정으로 돌아오곤 했다는 것.
그 뿐 아니라 가정으로 돌아와서는 나의 사랑과 희생이 부족한가 보다 하고 더욱 열심히 인내하고 희생하고, 남편의 요청대로 교회활동은 물론 모든 사회활동을 접고 오직 가정에 충성하다 보니 사회성과 독립성도 차츰 잃게 되고 집안에 갇혀 변변히 자신의 일상을 나눌 친구조차 만들 수 없었다 했다.
이와 같은 습관성 가정 내 폭력은 '폭력 사이클(Violence Cycle)'이라는 것으로 설명되는데, 긴장고조기, 위협기, 폭발기, 후회기, 약속기, 허니문기가 바로 그 사이클을 구성한다.
긴장고조기('나를 자꾸만 짜증나게 하고 있구만')란 구타자의 내적인 압력이 상승하고 축적되는 시기이며 그 다음 위협기('바보 같은 것이 나를 더 짜증나게 하는 구만')에서는 긴장고조기의 내적인 압력이 언어적인 위협이나 신체적이 위협으로 표출된다.
위협기에 이은 폭발기('너 한번 맞아 볼래')에서는 위협기에서의 언어적, 신체적 위협이 실제 폭력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후회기('그때 좀 참지, 왜 나를 자극해서..')는 폭력 후에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는 시기로 일반적으로 구타자는 폭력의 원인을 피해자에게 돌리곤 한다.
그리고 그 다음의 약속기('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에서는 구타자가 폭력 후에 피해자의 반응을 보면서 피해자를 달래고 약속을 남발하게 되는데, 그야말로 구타자가 피해자에게 손이 발이 되게 비는 시기이다.
그리고 허니문기('사실 우리는 잘 지냈었는데 그지'), 이 시기에서 구타자는 부부간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폭력으로 인한 심각한 문제를 덮고 신혼초기처럼 평소보다 더 잘해주곤 한다.
이와 같은 가정 내 폭력의 사이클은 허니문기를 지나 다시 긴장고조기, 위협기, 폭발기, 후회기, 약속기, 그리고 다시 허니문기로 이어져 위와 같은 26년간의 습관성 폭력이 가능했던 것이다.
26년간의 그녀의 인내는 폭력사이클에서와 같이 오히려 남편의 폭력을 더욱 가중시키고 습관성으로 키운 꼴이 되었다.
진작에 그녀에게는 그녀 자신을 위해 그리고 구타자인 남편을 위해 폭력사이클의 고리를 어느 선에선가 끊는 작업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녀가 우선적으로 해야 했던 것은 바로 '남편의 폭력'을 폭력으로 '인정'하는 일이였다.
이 폭력사이클의 가장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바로 폭력에 대한 '부정(Denial)'이다.
즉 그녀는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폭력적인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고, 그녀가 사랑하고 남편으로 선택한 사람이 구타자라는 것 그리고 자신이 그 구타를 당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이런 부정과 가정수호라는 지상과제, 그리고 엄청난 인내심이 남편의 26년간의 폭력을 가능하게 했고, 그녀의 영혼의 피폐를 가져온 것이다.
흔히들 가정 내 폭력은 단지 부부싸움으로 다른 이들이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며, 때릴 만 했으니 때린 것이고, 맞을 만 했으니 맞은 것이라고 치부해버리고 외면하기 쉽다.
하지만 더 이상 가정 내 폭력은 부부싸움이 아니며 폭력행위, 범법 행위이다.
굳이 법적조치가 필요한 행위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습관적으로 지속된다면 폭력은 한 인간의 영혼을, 한 인간의 삶을 파괴할 수 있다.
상담 첫 시간, 그녀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켄유 헬미? (Can you help me?)"
이는 단순히 누구로부터 도움을 청하는 말이었다기 보다 숨겨진 남편의 폭력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는 그녀의 선언 같은 것이었다.
수치스럽고 부끄러워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었던 남편의 폭력을 폭력으로 인정하고 이를 세상에 알리고자 하는 외침, 도움의 손길에 대한 첫마디 외침이었던 것이다.
어떤 형태든 어떤 이유에서 발생한 폭력이든 폭력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보장 받지 못하는 한 어느 곳도 더 이상 지상 낙원일 수는 없다.
가정 내 폭력의 예외지역이 아닌 이곳 캐나다에 살고 있는 우리 삶 속에 이처럼 숨겨진 가정 내 폭력은 없는지. 혹시 내 삶 속에 이 폭력이 부끄러움과 수치, 그리고 사랑과 인내, 희생이라는 명목 하에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닌지. 내 주변에 이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은 없는지. 혹시 그렇다면 지금이 바로 폭력을 폭력으로 인정하고 "켄유 헬미?" 를 외치며 도움을 청해야 하는 시기일 것이다.
"켄(유( 리(얼(리(헬(미? (Can you really help me?)"
이것은 바로 가정 내 폭력을 인정하고 그 고리를 끊어 버리고자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첫 외침일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