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김미라의 상담수기] 2-"나 어떡해!" - 우울한 아침

Vancouver

2001.09.12 23:15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기사 공유
부모의 지나친 기대감,청소년 정신건강 해쳐
"저 어떻게 하면 좋아요? 어떻게 하죠?"
상담실로 들어서자 마자 그는 상기된 얼굴표정으로 이렇게 첫마디를 열었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으로.
차츰 그를 진정시키면서 그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나마 그가 이렇게 상담실을 찾아 온 것,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얻고자 하는 의지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에 대해 다행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식욕부진과 체증감소. 불면증. 불안 초조. 대인 기피증. 의욕상실. "나는 할 수 없다"는 자신감 상실과 부정적 사고. 자살에 대한 생각. 특히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다 아침이 되면 좀처럼 침대에서 일어나기 힘들고, 그러다 보니 습관적으로 오전수업을 빼먹게 되고. 오후가 되어 간신히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조금 나아지기는 하지만, 반복되는 우울한 아침과 무기력한 생활은 그에게서 미래에 대한 희망과 자신감을 빼앗고 삶의 의미마저 잃어 버리게 하고 있다고 했다.

그가 호소한 일련의 증세들은 전형적인 우울증의 증세들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를 그토록 우울하고 절망스럽게 만들고 삶의 의미조차 상실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는지.
몇 차례 상담시간을 가지면서 그를 괴롭히는 있는 우울함과 무기력함의 원인이 바로 부모님의 기대에 대한 그의 지나친 부담감에서 시작되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대학 3년생으로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는 그는 부모님으로부터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장남이었고, 그가 경영학을 전공으로 선택한 것은 사업을 하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대학에 입학해서 부모님의 희망대로 경영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그것이 자신의 적성과는 맞지 않고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차츰 공부에 대한 흥미도 잃어가고 있다고 했다.

부모님의 기대에 어긋날 수 없다는 부담감. 장남과 세형제의 맏형으로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 수년동안 누적되었던 이러한 부담감과 의무감은 '우울증'이라는 모습으로 폭발하여 그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가정에서 뿐 아니라 학교에서도 줄곧 우등생으로 한번도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는 그에게 수개월동안 지속되고 있는 우울증과 이에 따른 학업부진은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함과 초조함으로 이어져, 악순환처럼 그의 우울한 아침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에게 진정으로 필요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에게 진작부터 필요했던 것은 부모님에 대한 기대에 부응하고자 하는 지나친 부담,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초조함의 누적, 그리고 막형으로서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의 수행이 아니라 자신의 희망과 미래에 대한 부모님과의 허심탄회한 대화였을 것이다.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미래에 무엇을 하며 살기를 원하는지.
비가 많은 밴쿠버에는 유난히 우울증(Depression)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울증은 그 원인과 정도, 지속기간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감기와 같이 일생에 한,두번 정도는 보통 사람들이 경험하게 되는 마음의 병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주로 남성보다는 여성들이 더 많이 경험하게 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는데, 남성들 중에서 열 명중에 한 명, 여성들 중에서는 다섯 명중에 한명정도가 일생에 한번은 우울증을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

최근에는 청소년우울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 이는 우울증이 청소년 자살의 주요원인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청소년 우울증은 이들의 학교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부모들과 자녀들간의 관계와 부모들간의 관계 등 주로 가정생활의 문제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부모님의 기대와 그에 대한 지나친 부담감이 우울증으로 발전한 위의 대학생의 이야기는 '자녀교육'을 이민의 첫번째 이유로 꼽는 이민사회에서 결코 남의 이야기일수만은 없을 것이다.

'자녀교육'이라는 명분과 본국에서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타국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데 따른 부모들의 남다른 결심과 각오는 자녀들에 대한 지나친 기대로 이어지고, 이러한 부모님의 기대가 자녀들의 심리적 부담과 이로 인한 마음의 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언어를 어른들보다 쉽게 극복한다는 이유로 흔히들 부모들은 청소년기의 자녀들이 별다른 문제없이 새 생활에 잘 적응하는 것으로 여기기 쉽다.
그러나 실제 이민가정에서 청소년들이 겪어내야 하는 고통의 몫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심각할 수 있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타국에서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는 것 이상으로, 모든 것을 희생하고 있는 부모의 기대와 이에 대한 부담감, 그리고 기대에 어긋나지 않고자 하는 데서 오는 초조함과 두려움은 어쩌면 이민 가정 내에서 청소년들이 겪어 내야 하는 마음의 고통중의 하나일 것이다.
종래는 우울증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좀처럼 마음의 여유를 찾기 힘든 이민생활이지만, 진정으로 '자녀들을 위한' 이민이 였다면, 그래도 자녀들과의 대화의 창을 열어 오늘 내 아들과 딸이 이국 땅에서 겪고 있는 마음의 병은 없는지,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부모의 기대가 오늘 그들을 더욱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녀들의 마음을 나눌 조금의 여유가 필요할 것 같다.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