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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그 사람 ]가주 봉제협회 초대 회장 변창환

Los Angeles

2001.11.01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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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리더십으로 봉제업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남가주 한인 이민이 본격화되기 시작하던 시절, 한인 커뮤니티가 경제적으로 자리를 잡는데는 봉제업계의 역할이 컸다. 봉제업계는 대형 백화점이나 의류상에 제품을 납품하면서 주류사회의 ‘큰돈’을 한인커뮤니티로 끌어들였다. 분야마다 종사자들의 피땀 흘린 노력과 단체 차원의 협조가 한인커뮤니티의 경제성장에 영향을 미쳤지만 당시 봉제업계의 역할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어렵기만 하던 때에 봉제업계가 자리를 잡고 주류사회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게 되기 까지에는 봉제협회 초대 회장이었던 변창환씨의 역할이 컸다.

그의 미국생활이 10년 가까이 접어들던 1977년 봄 어느날, 보험업에 종사하고 있던 변창환씨는 다운타운의 봉제 공장에 갔다가 이상한 장면을 목격했다. 노동청에서 일제 단속을 나왔다며 공장안이 온통 수라장이 되어있었다. 단속반원들이 회사 장부를 내던지고 책상을 치면서 ‘갓 댐 코리언’ 소리가 계속 터져 나왔다. 봉제공장 사람들을 죄인 다루듯 하고 있는데 당하는 사람들은 일도 못하고 겁에 질린 표정들이었다. 한인 봉제업자들의 인권이 여지없이 짓밟히고 있는 현장을 보면서 변창환씨는 어이가 없었다. 최저 임금법이 책정된 것은 1975년이지만 2년이 지난 그때까지도 사실상 전혀 시행이 안되고 있을 때였다. 그런 상황에서 일정 기간을 주거나 경고를 하지도 않고 노동청 직원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법을 어겼다고 난리를 치기 시작한지가 벌써 일주일째라고 했다.

이대로 있어서는 안되겠다 싶었다. 그길로 변창환씨는 봉제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사람들을 모았다. 본인은 봉제업에 몸담고 있지 않았지만 이기명, 이원준, 박창훈, 김히영, 한삼권씨 등과 자리를 같이 해서 의견을 나누었다. 이렇게 당할 수만은 없다는 토론 끝에 협회를 만들어 힘을 모으자고 합의했다.

그해 5월 12일, 한인 봉제 협회 창립 총회에는 50여명의 봉제업자들이 모였다. 그리고 봉제회사들을 대상으로 보험을 하던 변창환씨가 초대 회장이 됐다. 한인커뮤니티에서 한인회, 상공회의소, 간호협회에 이어 네번째 생긴 조직체다. 변창환씨는 회장 취임 후 봉제협회보를 발행하기 시작해 한인커뮤니티 단체중 제일 먼저 협회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2대, 3대까지 3년간 봉제협회를 이끌면서 한인 봉제업계 내부의 체계를 잡고 봉제업자들의 권리도 찾아놓았다.

“협회보를 격주간으로 만들어 회원들에게 각종 정보도 제공하면서 업자간에 경쟁을 하느라 반목하던 분위기를 쇄신하는데 주력했지요. 회원들에게는 단속을 나온 직원의 명함을 반드시 받아두라는 것과 부당하게 행동한 게 있으면 그대로 기록했다가 협회로 적어서 보내라고 했습니다. 또 같은 건물에서 봉제회사를 하는 한인들끼리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도 서로 인사도 안하고 지내던 풍토를 우리끼리 서로 도와야 권익을 찾을 수 있다고 협조를 호소했습니다. 곧 변화가 오기 시작했어요. 옆집 미싱이 고장나면 달려가서 고쳐주기도 하고 일손이 딸린다고 하면 일하는 사람을 보내주기도 했어요. 이런 것들이 힘이 되어 센추리 호텔에서 열린 제2회 봉제협회 총회에는 1백30명이 모였어요.”
정보에 어둡던 시절이라 단체와 단체 협회보의 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막강한 것이었다. 의류업계와 봉제업계에 관한 각종 정보에서부터 봉제회사 운영에 대한 교육에 이르기까지 봉제협회보의 역할은 컸다. 협회 측에서는 연방 노동청과 연방 상하원, 주의회에 거의 매일이다시피 항의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회원들이 보내오는 내용을 변창환씨와 박학도씨가 영어로 정리해 보낸 것이다. 고발장이 얼마나 많이 쏟아져 들어오는지 어느 날은 밤을 새워가며 번역하는 날도 있었다. 비슷한 내용의 불만이 반복해서 접수되니까 당국으로서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아시아계인 샘 하야가와 연방상원에게는 단속반원이 내뱉었던 ‘갓 댐 코리아’ 대신 ‘갓 댐 아시안’이라고 했다고 단어를 바꾸어 보냄으로써 그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하야가와 의원의 제안에 따라 열린 노동청 청문회에서 당시의 단속반원 두명은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재미있는 것은 그러다보니 회원들이 단체의 결정이나 협회보의 주장을 무조건 믿고 따라주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느 집에서 누구와 계약을 맺고 일하는데 다른 집에서 계약을 빼앗아 갔으니 이건 나쁜 일이다, 일거리를 돌려주라고 기사를 쓰면 그대로 했다는 사실이다. 자연히 볼쌍 사나운 이웃간의 일들은 사라지고 사업 질서도 깨끗하게 잡혀졌다. 이렇게 해서 봉제업계 한인 종사자들의 실력과 함께 정신이나 정서가 든든하고 아름다운 옷감처럼 짜여갔다. 변창환씨는 ‘강력한 리더’로서 봉제협회를 이끌어 가면서 탄탄한 단체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는 한인 커뮤니티 경제력의 원천이 봉제업이었어요. 백화점이나 대형 의류점에 물건을 납품해서 전적으로 주류사회의 돈을 한인커뮤니티로 끌어들였지요. 당시 봉제업계에서 한인커뮤니티로 들어온 주류사회의 돈은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이러한 봉제업계의 성장은 한인들의 취업에도 큰 공헌을 했고 수입이 늘자 한인들의 소비가 늘고 한인 커뮤니티의 경제가 전체적으로 활성화될 수 있었다.

봉제업계뿐만 아니라 한인 커뮤니티 전체를 위해 힘을 키워야한다는 생각에서 1979년 변창환씨는 공식 로비단체인 KPAC(Korean American Political Action Committee 한인 정치 활동 위원회)를 만들어 등록했다. 회원이 1백명이 넘는 로비단체는 정치인 1인에게 5천달러까지 줄 수 있기 때문에 변회장은 한인커뮤니티를 도와줄만한 정치가에게 정치헌금을 하면서 ‘한인들의 힘’을 보여줬다.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 정치헌금을 하고 지지 의사를 밝히니까 이사람들이 한인커뮤니티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정치가들 사이에서는 KPAC에 대한 소문이 퍼져서 그쪽에서 먼저 손을 뻗쳐오는 거에요. 도와달라고 요청을 해오는 정치인들이 많았습니다.”
KPAC의 힘은 컸다. 정치헌금이나 도움을 받은 정치인들에게 이쪽에서는 한국계를 채용해달라고 요청했는데 대부분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KPAC의 조직력과 인원 동원 능력을 정치인들도 인정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 힘으로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때는 베니스와 코리아타운 내 5구간 성화 봉송을 우리가 하게 됐고 동아마라톤을 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아냈다. 여세를 몰아 변창환씨는 CHP와 LAPD의 후원회를 조직했다. 한인들의 안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성공적인 로비활동을 인지한 주류 정계에서 변창환씨에게 한인들만의 ‘84 레이건 부시 재선 전국 공화당 위원회’를 조직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소수계로는 전국위원회 조직이 처음이었다. 변창환씨는 전국에 24개 지부를 조직하고 신자 도브(전 네브라스카주 연방하원 할 도브의원의 전 아내)씨와 공동의장이 되어 레이건 부시 캠페인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해 10월5일에는 전국 위원 34명과 함께 백악관에 들어가 레이건 대통령 부부를 만나기도 했다. 11월 총선에서 공화당이 승리하자 ‘84 레이건 부시 재선 전국 위원회’는 ‘한인 공화당 전국위원회’로 이름을 바꾸고 의장단이 그대로 유임됐고, 변창환씨는 공화당 가주 대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었다.

변창환씨는 경북 청도 출생으로 명지대학을 졸업했고 1967년에 한국을 떠나 카나다와 뉴욕을 거쳐 1969년부터 로스앤젤레스 교민으로 살아오고 있다. 외국생활 2년을 거친 후라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안정된 생활로 정착하는데 비교적 짧은 시간이 걸렸다.

이민 생활 30여년에 고희를 바라보는 그는 이민 1세의 성공을 ‘자녀들이 미국의 법을 지키면서 한국의 문화권 안에서 다른 사람을 존경하고 돕도록 2중 문화를 이해하게 키우는 것’것이라고 했다. 그는 LA 노인 후원회와 재미 노인 모국 방문단, 정화위원회를 만들었고 한인회 이사장, 한인회 선관위원장, LA-부산 자매 도시 공동 위원장 등을 지냈다. 현재 LA 시 컨벤션 위원회 커미셔너, 에어포트 위원회 커미셔너이고 부인 다나(60)씨와 함께 녹음 테입 수출입 회사인 은성 인터내셔널을 운영하고 있다. 외아들 윌리엄은 녹음 스튜디오 Electra 2001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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