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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엽 기자의 귀연일기] LA서 한 할머니 독자의 선물을 받고 인생을 생각했다

지난주 국제소포를 받았다. 발송인은 LA에 사는 생면부지나 다름없는 한 할머니였다. 두어 달 전인가 내게 국제전화를 걸어 온 바로 그 분이었다. 할머니는 그때 편지를 띄울까 한다고 집 주소를 알려 달라고 했었다.

헌데 이번에 단순히 편지만 부친 게 아니라 선물 꾸러미도 같이 보내왔다. 제법 큼직한 종이 상자 안에는 고급 커피 두 봉과 역시 고급인 중국 차 한 봉지 그리고 먹음직스럽게 생긴 육포가 가득 들어 있었다. 차곡차곡 상자 안에 포개져 있는 할머니의 정성을 대하니 얼굴이 달아 올랐다. 국제소포로 선물을 받을만한 일을 한 적이 없다는 걸 내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에 느닷없는 선물 꾸러미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물 상자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동봉한 편지를 꺼내 읽어내려 갔다. 석 장 짜리 편지였다. 한 줄 한 줄 할머니의 진심과 성의가 담겨 있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그러나 편지를 다 읽고 난 뒤 나는 가벼운 정신적 통증을 느껴야 했다. 기분 좋은 편지였지만 채찍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LA 할머니는 내 어머니 연배인 분이셨다. 편지로 추정컨대 내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등 노인 세 분과 함께 사는 데 대해 무엇보다 좋은 인상을 받은 거 같았다. 할머니는 편지를 통해 내게 힘이 되어주는 여러 가지 얘기를 해줬다.

그러나 사실 나는 LA 할머니는 물론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만큼 훌륭한 아들 혹은 손자가 전혀 못 되는 사람이다. 노부모와 조모 이렇게 모두 세 명의 노인과 함께 산다는 이유로 아주 착한 사람처럼 과대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우리 집 노인 세분과 동거하며 나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다. 짜증과 긴장 자포자기를 하는 시간이 그렇지 않은 시간보다 훨씬 많은 날도 있다. 특히 할머니와 할머니를 많이 닮은 아버지와는 내 성격이 너무 달라서 집 안에 불편하고 긴장감이 돌 때가 적지 않다.

편치 않은 생각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고 한동안 맴돌 때면 나는 으레 '산다는 게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떠올리곤 한다. 노인 세 분과 1년 넘게 함께 살며 그간 오십 남짓한 평생에 걸쳐 고민한 것보다 '산다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해보게 됐다.

그러나 강퍅한 성격에 아둔하기 짝이 없는 탓에 나는 그간의 숱한 고민에도 불구하고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조금도 얻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다는 게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그 자체가 묘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삶을 본질 수준에서 회의할 때마다 체험하는 카타르시스는 어쩌면 내겐 마약과도 같다. 내가 상습적으로 삶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이유는 바로 이 카타르시스 맛보기에 재미가 들려서인지도 모른다.고백하자면 지난 네댓 해 동안 나는 '북극의 카타르시스'를 즐겨 왔다. 2007년 늦봄 알래스카 최북단을 홀로 여행할 때 얻은 강렬한 체험이 해를 더하면서 기억에서 사라지기는커녕 뇌리에 더 깊이 뿌리를 박고 있는 형편이다. 당시 이름도 모를 거친 벌판에서 서서 온몸으로 마파람을 맞는데 알 수 없이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주르르 흘려 내렸다.

돌아보면 그 것은 일종의 세례였다. 온갖 죄악과 허물이 한 순간에 다 씻겨나가는 듯했다. 차디찬 대지 헐벗은 광야에 홀로 선 존재 어쩌면 그게 인간의 본래 모습인지도 모른다. 일순간이나마 인간의 본성을 깨달았다고 할까. 노인 세분과 살면서 느끼는 심적 갈등은 본질적으로 모두 내게서 비롯된 일이다. 네 탓이 아니고 내 탓이란 말이다.

요컨대 LA 할머니의 편지는 일상의 어리석음 속에서 헤매는 내게 날아온 '정신 망치'나 다름없었다. 아팠지만 번쩍 정신이 뜨이는 그 망치의 힘 때문에 나는 앞으로 한동안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지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덕분에 또 얼마 만에 한참 신나게 울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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